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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네가 너무 좋아서

 

지난밤, 심청추는 자처하여 낙빙하를 유혹했다.

수아검 심청추가 남을 유혹한다니! 그는 여성을 포함하여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구를 꼬셔본 경험이 없었다. 사람은 필요할 때 언제나 적재적소에 있었고, 근래 사귄 연인과는 서로를 원할 때면 적극적으로 달려들기 바빴으니 그런 행위를 조금도 할 이유가 없었다. 아, 박피마는 셈에서 제외한다.

 

그런데도 심청추가 굳이 나서 낙빙하를 자극한 이유란, 하필 제 생일이 색사일과 겹치는 탓이었다. 낙빙하와 심청추는 첫 경험 이후 색사에 며칠 간격을 두었다. 천주를 지닌 것도 모자라 원작자가 보증한 허벅지 통해 제 힘을 자랑하는 게 바로 낙빙하이니, 심청추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매일 같이 상대하려면 일월로화지로 여분의 몸을 삼천은 준비해야만 했다. 가능할 리 없는 일이고, 가능하더라도 말려야 할 일이니 결국 그들은 사흘에서 나흘 사이로 날을 정했다. 그런데 하필 생일이 바로 그 날이었다. 혹자는 ‘오. 마침 좋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심성추는 달랐다. 상대가 남주라는 이유로 항시 허리 통증을 수반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그야말로 뒷골이 당겨오는 일이다.

 

낙빙하는 《광오선마도》의 팬이라면 백이면 백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게 분명할 정도로, 엄청난 소녀심을 지녔다. 이때의 소녀심이란 장르를 BL로 바꿀 정도로 순정이 극에 달한 마음을 칭한다! 물론 상청화가 간간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빙하 소녀도 나름 냉정한 모양이지만, 심청추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어리숙했다. 언제 어디서든 낙빙하는 정을 호소하고, 갈구하고, 제 것은 모조리 스승에게 퍼부었다. 그러니 창궁산을 떠나 함께 산 이후로 낙빙하는 매일 같이 갖은 기념일을 챙기기 바빴다. 그에 맞춰 반찬이 매번 다채롭게 변했으니 심청추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걸 허락한 후에 벌어졌다. 낙빙하는 그가 찾아온 기념일이 색사일과 겹치면 음식만 새로이 준비하지 않았고, 매회 어디서 기이한 플레이를 찾아와 공부하더니 기어코 실천해냈다. 그런 날이면 심청추는 아뿔싸, 그날 조반에 자양강장제나 다름없는 반찬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자각이 늦어, 알 때면 이미 침대에서 비명을 지르기 마련이었다. 다음엔 절대 안 당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심청추는 매번 속았다. 순정의 순 자도 관심이 없는 심청추가 어찌 낙빙하를 이기겠는가?

 

그러나 기념일을 모를지언정 제 생일마저 모르진 않았다. 심청추는 한참 전부터 이때만큼은 피하자고 세뇌에 가깝도록 되뇌었다. 그러다 어느새 하루 전이었다. 작정하고 바라보니 과연 낙빙하의 속셈이 눈에 보였다. 무언가 이벤트를 준비하는 듯했다. 미안한 말이다만 심청추는 지레 겁을 먹었고, 내일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싹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작심하고 낙빙하를 유혹했다! 하루를 앞당기면, 그가 준비한 이벤트는 어쨌건 ‘오늘은 할 날이 아니잖니.’라고 미룰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낙빙하의 성정상 당일이 아니면 천만금을 준 이벤트여도 행하지 않을 테니, 필시 먼 미래 시기가 겹치는 날까지도 미룰 수 있겠고.

 

제자를 꾀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낙빙하가 심청추를 알듯이 심청추 또한 연인의 취향을 속속들이 알았다. 다만 염려한 바가 있다면 심청추 스스로 속이 뻔히 보일 거란 점이었다. 그런데도 넘어오겠느냐……. 낙빙하는 고민하는 듯했지만, 종국에는 심청추에게 홀라당 넘어왔다. 심청추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을 기막힌 방법을 고안했기 때문이었는데─간밤의 사연은 생략한다. 본 합작의 열람 수위에 저어되는 것도 것일뿐더러, 절대로 혼자만 알겠다는 남주 낙○○군의 압력이 강력했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심청추가 간밤에 끝내주는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과 그런데도 아침부터 기분이 영 더럽다는 점이다.

 

유혹도, 목적도 모두 성공했다. 그러니 심청추는 밤을 무서워할 필요 없이, 그저 개운한 기분으로 생일상을 받고 온종일 “어제 너무 무리했다.”라며 느긋하게 뒹굴기나 하면 될 터였다. 다리 사이가 시달릴 일이 없으니 창궁산에도 한 차례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고. 여러모로 성공적인 결과였고, 기분이 좋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심청추는 근래 중 가장 속이 불편했다.

바로, 간밤에 낙빙하가 지은 표정 탓에.

 

그야말로 굉장한 색사였다. 횟수로 족히 세 번을 채운 후 낙빙하는 물러났는데, 그때 심청추는 기어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잠자리에서 우는 일은 통상 아파서일 때가 많았으나, 이때만큼은 그저 너무 좋은 탓이었다. 이불 위 실력은 영 형편없는 게 바로 제 제자이건만, 마치 솜씨를 익혀 하루 일찍 선물한 듯했다. 이 마음이 서로 같았는지, 낙빙하도 눈물을 닦아준 후 그도 뚝뚝 울었다. 당신이 좋아서 참을 수 없다고 낙빙하가 이미 몇 번이고 전한 마음을 되풀이하자, 이번에는 심청추가 낙빙하의 눈을 닦아주고 코를 풀어주었다. 그 순간에는 색사를 나눈 사이보다는 어린 제자와 한참 큰 스승 같았다. 다행히 그때와 달리 제자의 몸이 한 번 더 다리를 얽어도 될 만큼 부쩍 자라 있었다.

그들은 침의를 가볍게 걸친 채 서로를 마주 보고 몇 번 입을 맞추다가, 손가락과 혀를 동시에 얽은 채로 한참 서로를 느꼈다. 이때만 해도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하여, 좋다 못해 심취한 나머지, 심청추는 그새 제 생일이 다가온 것을 잊고 마치 낙빙하에게 선물이라도 줄 것처럼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마.”

 

마침 동이 트고 있었다. 푸르른 새벽빛이 창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심청추가 낙빙하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다가 그 살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는 낙빙하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낙빙하는 꼭 마계에서 보인다는 혼세마왕의 면모처럼, 그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심청추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딱히 어떤 반응을 하라고 강요할 셈은 아니었지만, 심청추는 내심 낙빙하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댈 것을 상상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를 기대했지만,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차게 식은 표정은 아니었다. 심청추는 너무 놀란 나머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그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련의 일 속에서 심청추는 낙빙하를 오해할 것 같으면, 대화를 해보기로 하지 않았나. 그가 낙빙하에게 한 차례 되물었다.

 

“정말로 없어?”

“네.”

“…….”

 

그렇다니 이건 할 말이 또 없네. 심청추와 낙빙하는 입가에 타액이 더러 묻어 있었다. 심청추는 그것을 말끔히 닦아주는 걸 아주 좋아했지만, 이 순간에는 그럴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바람이 찼고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싸늘했다. 심청추는 조금 머뭇대다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럼 자거라.”

 

그는 저 자신이 다소 상처받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등을 돌리면 너무 티가 날까 봐 짐짓 태연한 척하며 눈을 감고 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추위를 탄다고 여겼는지 낙빙하가 곧 그를 제 품에 당겼다. 심청추가 그 품을 마치 ‘낙빙하처럼’ 파고들며 제 표정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리에 쌔근쌔근, 낙빙하가 잠에 빠져 내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틈에 심청추가 고개를 들고 기다렸다는 듯 낙빙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이마에 새겨진 문양도, 반듯한 눈썹도, 기다란 속눈썹도, 햇볕을 몇 날 며칠 받고도 타지 않는 새하얀 피부도 모두 낙빙하의 것이 맞는데, 분명히 낙빙하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귀 모양새까지 살펴보고 심청추는 한숨을 내쉬었다. 빙하가 이럴 수도 있지. 애가 항상 귀여워야 하는 건 아니니깐……. 그러나 심청추가 스스로 새긴 상처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아예 줄기가 머릿속까지 자라나 잎이라도 틔운 듯했다. 푸념이 자꾸만 관자놀이를 들쑤셨다.

조금 전까지 너무 좋았잖아, 갑자기 이러는 게 말이 돼!? 되, 될 수도 있지……. 그리 되뇌며 이해하다가도, 심청추는 낙빙하의 얼굴을 다시금 살피며 빙하가 맞는데!?, 하고 상념에 빠졌다. 새벽 내내 이러기를 반복하니 잠을 설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가까스로 잠이 들고도 몸도 마음도 지친 채 눈을 떴다.

피로가 풀리지 않아, 눈을 뜨자마자 하품부터 뱉은 뒤, 심청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주변에 한 명 몫의 기척이 없었다. 내가 늦잠을 잤나, 조반을 차리러 간 모양이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심청추는 마음을 다잡았다. 간밤의 일이 어쩌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잘못 기억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낙빙하가 야심 차게 준비한 생일상을 받으면 눈 녹듯이 풀릴 감정이다.

 

그러나 낙빙하는 반 시진이 지나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 사이 심청추는 잠이 다 깨,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단장마저 마쳤다. 낙빙하가 이럴 리 없다.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야 뻔하다. 일단은 창궁산으로 가 상담을…….

 

그런데 어느새 심청추는 발을 떼기 직전에 모든 걸 포기하고 드러눕고 말았다.

햇볕이 뜨거웠고 배가 고프니 기운이 나질 않았다. 벽곡수련을 해봐야 남주의 요리 앞에선 쓸모가 없군. 우스갯소리나 내뱉으며 심청추는 배를 매만졌다. 창궁산에 가면 뭐든 대접해올 게 분명하니 허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냥 눈을 꾹 감게 됐다. 낙빙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없다. 이 세계의 지존이나 진배없는데. 필경 무슨 생각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찾으러 가기보다는,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기다려주는 게 아마도 그가 바라는 일이겠지. 이곳은 빙하와 그의 집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심청추가 부족한 잠을 다시 청하려 할 즈음, 멀찍이서 산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청추는 소리로 보폭을 느끼고, 그 간격이 낙빙하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심청추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감은 채로 기다렸다. 마치 잠버릇이 나빠 벌러덩 몸을 밖에 내놓은 것처럼. 곧 인기척이 그 앞까지 다가왔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런데 심청추 위로 그늘이 졌다. 그리하여 심청추가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니, 푹 주무시도록 돕겠다는 듯 낙빙하가 손을 들어 해를 가리고 있었다.

 

‘…….’

 

심청추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낙빙하와 눈을 마주쳤다. 간밤의 일을 착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따스한 눈빛으로 낙빙하가 그를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다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낙빙하는 마치 갓 물을 뜨다 온 아낙네처럼 머리를 뒤로 묶었고, 허리에는 보자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 안에 열매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디를 갔나 했더니 뭐라도 따온 모양이다.

심청추도 낙빙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덕분에 심청추는 제 얼굴이 이제까지 굳어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가 너무 늦었죠.”

 

낙빙하가 스승의 안위를 살피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개수가 좀 모자라 시장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그 정도면 너와 나 먹기는 충분하지 않으냐?”

“…….”

 

돌연 낙빙하의 얼굴이 다시금 지난날처럼 굳어졌다. 심청추가 그 표정을 보고 또 한 번 덜컥 심장이 가라앉았지만, 이제는 모르는 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속내를 밝혔다.

 

“빙하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거라. 사존은, 네가…맘을 죽이는 게 싫다.”

 

혹 다그치는 것으로 오해를 살까 싶어, 심청추가 낙빙하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고작 그것으로 낙빙하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앉혔다. 그러다 고개를 푹 숙이곤 입을 열었다.

 

“…저는 사존께 저를 숨기는 일조차 못 하네요.”

“내게 너를 숨기려 했다고!?”

 

허나 이건 나무랄 수밖에 없으니, 심청추는 저도 모르게 호통쳤다. 그러나 낙빙하는 오해 없이 심청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다소 수줍은 듯 우물대며 말했다.

 

“……못난 모습은 보여드리고 싶지 않은걸요.”

“못난 모습? 네게 가능한 말이야?”

“예?”

“…….”

 

주접이 튀어 나가 버렸네. 심청추가 입을 다물었다. 하필 이럴 때 쥘부채가 곁에 없다. 심청추가 낙빙하의 손을 부채처럼 들어 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못난 너도 네가 아니겠느냐? 사존이 다 아껴줄 터이니 말해 보아라.”

 

낙빙하가 흠칫 놀라며 손을 빼려 했으나, 심청추는 보란 듯이 그것을 볼에 갖다 댔다. 그러자 낙빙하의 볼이 발그랗게 물들었고, 더는 도망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숨을 내쉬고는 순순히 속을 꺼냈다.

 

“오늘은 제가 사존께 바라는 걸 이뤄드리는 날인데, 제 소망이 이를 해칠까 겁이 나요.”

“무엇이기에?”

 

심청추는 잠시 고민해보았다. 나야말로 너에게 바랄 게 더 없는데…….

 

“제자가 사존께 바라는 것은 언제나 제 곁에 계시는 것이에요. 허나 만약 사존께서, 오늘, 창궁산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면요. 그래서 저를 하루 일찍 아껴주신 거라면요……. 저는 사존께서 가지 않는 게 저의 소망이라 할 테고, 사존은 들어주고자 속을 숨기시겠지요. 불초한 제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낙빙하는 더없이 진지했고, 심청추는…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고작 그런 걸 걱정했다고! 심청추는 부채로 낙빙하의 이마를 한 대 쳐주고 싶었다.

비웃음을 샀으나, 낙빙하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도리어 스스로가 영락없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버섯아, 일어서! 이런 거로 슬퍼하지 마! 심청추는 마치 아동용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낙빙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그들의 장르가 BL로 변했으니 이것이야말로 특효약이었다. 낙빙하가 간밤의 심청추처럼 연인의 품을 파고들었고, 심청추는 그를 안아주었다. 그런데 그 반동으로 낙빙하가 품고 있던 열매를 모두 떨어뜨렸다.

 

“앗.”

 

낙빙하가 심청추에게 안긴 채로 손을 뻗어 그것을 줍고자 했고, 심청추도 이를 도왔다. 그러나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결국 열매가 데굴데굴 땅에 굴러다니고 말았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 보곤 푸훗 웃었다.

 

 

* * *

 

 

낙빙하는 여러모로 심란한 나머지 조반상을 차리지 못하고 시장에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산을 올라 사백들에게 챙겨줄 열매를 개수별로 챙기고 있었다고. 그런데 딱 하나가 부족하여 다시 시장이 나갔단다. 심청추가 류사제의 것을 챙기지 않으려고 한 거냐고 물으니, 낙빙하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류…사숙의 것을 왜요? 상사숙이 안정봉을 비웠을 수 있어 셈을 고민했을 뿐입니다.’

 

심청추가 할 말이 없어서 ‘그가 북강에 자주 간다지. 막북군과 사이가 좋은가 보구나.’라며 말을 돌렸다. 흠흠, 낙빙하랑 류청가도 좋아질 날이 오겠는데. 하고 기대하며. 물론, 기대는 낙빙하가 창궁산 결계를 넘자마자 곧장 백전봉 제자에게서 검이 날아온 탓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심청추는 낙빙하와 함께 창궁산에 왔다. 심청추가 “네가 바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라고 말해주었으나 낙빙하가 기어코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환대 보다 먼저 당장 나가라는 대우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받았다.

그러나 어쨌건 청정봉주의 생일이 아니겠나? 낙빙하는 하루 면제권을 얻었고, 함께 궁정봉에 먼저 들렀다. 악청원이 ‘네 생일이 오늘이라고?’라고 물어왔을 때 심청추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무릇 생일이란 본인이 원하는 날짜로 정하기 마련이지요.’라고 둘러댔다.

 

그들은 청정봉 죽사로 돌아왔고, 심청추는 낙빙하에게 그 치수에 맞는 제자 의복을 입혔다. 두 사람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봉주의 생일을 경하코자 손님이 올 때마다 낙빙하가 직접 따온 열매를 하나씩 선물했다. 소쿠리가 바닥을 보일 때 심청추는 더는 올 사람이 없겠다 싶어 두 다리를 뻗고 채신머리없이 누웠다. 청정봉주 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낙빙하에게는 같이 살게 된 후로 이런 면모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낙빙하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심청추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스승과 달리 정갈하게 누워 심청추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잘까요.”

“응?”

 

그야말로 놀라운 말이라 심청추가 의아하여 물으니, 낙빙하가 공연히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연기하며 스승의 품을 파고들었다.

 

“피곤해요. 이대로 잘래요.”

 

네가 낙빙하인데 고작 이 정도로 어찌 피곤하겠니? 심청추는 가당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낙빙하를 꼭 안아주었다. 그 머릿속이 대충 보이는 듯했다. 자기 비하에 빠진 이 빙하 소녀는 분명히 ‘사존이 나를 용서해주셨으니, 나도 사존이 바라는 일을 할 거야.’라며 하루를 자고 가게 하겠다고 결심하겠지. 물론, 심청추가 모르는 구석에서 또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있을지 모른다. 어찌 그 마음의 깊이를 가늠하겠는가? 그런데 이리 멋대로 굴면, 심청추도 낙빙하에게 그가 모를 제 깊이를 보여주고 싶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니, 소리가 새어나가면 어찌하겠느냐?”

 

마치 심청추는 낙빙하가 행위를 채근한다는 듯이 말했고, 낙빙하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사존, 하루 미리 하셨잖아요…….”

 

뻔한 말을 하는군. 심청추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단순히 눈으로 살피는 걸 넘어 죽사 바깥에 지나다니는 인원까지 귀로 살피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살폈다. 이후, 그는 일부러 피해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공인 커플링이 아닌가.

 

심청추가 낙빙하의 턱을 휙 들어 올렸다. 피곤하다더니 낙빙하는 멀쩡하기만 하여, 두 눈을 놀란 듯 크게 떴다. 심청추가 그 귀여운 눈망울에 가볍게 입 맞추곤 말했다.

 

“오늘도 하자면 거절할 것이냐?”

“…….”

 

연기로 가득하던 낙빙하의 얼굴에 금세 열이 끌어 올랐다. 심청추가 도리어 태연하고 덤덤한 척 연기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소망이 내가 창궁산에 가지 않는 것이라고. 낙빙하, 스승이 속을 줄 알았더냐? 네가 바라는 게 이것인 걸 스승이 모를 줄 알고!”

 

회심의 일격으로, 심청추가 낙빙하의 허벅지를 한 대 쳤다!

 

“사, 사존……!”

 

낙빙하는 부인도 수긍도 하지 않고, 눈만 끔뻑이다가, 곧장 심청추에게 입술을 들이박았다. 곧 그가 스승의 배 위로 올라탔다. 심청추는 제 허리가 좀 더 그를 받기 편하도록 자세를 고치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수공사를 한 덕분인지 죽사 천장이 메워져 있었다. 그는 내일은 누가 이 일을 처리했는지 알아보고 칭찬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계획을 세웠다. 연이은 정사로 허리가 아프니, 며칠 더 창궁산에 있겠다고 하자고. 낙빙하가 지어 보일 얼굴이 제법 볼만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행복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저 너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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