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청추는 생일을 소소하게 보내는 편이었다.
얼마나 소소하게 보냈냐면, 그는 봉주들과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서 절대 선물을 받지 않았고, 잔치 분위기를 내는 모든 행위도 청정봉에서 제재시켰으며, 제일 중요하게도, 본인의 생일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심청추는 생각했다. 요란스럽게 구는 건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우아한 청정봉주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니 그가 스스로의 생일에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배 아프게 낳아주신 어머니를 위해 향 두 개를 태우는 것뿐이었다. 하나는 심원의 어머니께 드리는 것이었고, 하나는 심구의 이름 모를 어머니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피어오르는 연기 두 줄기를 볼 때마다 그는 오늘이 그의 생일임과 동시에, 그의 생일이 아님에 대해 유난히 착잡해했다. 사실 그는 청정봉주로서의 성격 같은 사소한 이유보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축하를 받는 게 꺼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심청추는 일을 해결해준 뒤 심심치 않게 들은 감사인사에 비해 축하인사는 받아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낙빙하와 그의 성친일도 포함해서. 조용히 단 둘이서 진행된 의례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는 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을 연인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심청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년가약을 했더라도 이전에 그 둘은 그만큼이나 얽히고설킨 관계였던 데다가, 이미 한 집에서 동거하고 있었으니 달라지는 일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청추는 성친 의식이 낙빙하와 그의 소소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모종의 연결끈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낙빙하도 그에게 새로운 관계에 따른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청정봉주의 생일까지 열흘이 남았다. 심청추는 부담스럽다는 듯이 접선으로 입가를 가리며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고, 그의 제자는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단 채로 심청추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가 낸 목소리는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의 것만큼이나 처연함이 묻어나왔다. 낙빙하가 낑낑거리며 말했다.
“사존께서는 돈이나 물건이 전혀 부족하지 않으신데다가, 물욕이 거의 무無에 가까운 문인이신 건 알고 있지만, 이제 부부 사이가 되었으니 제자가 생신 정도는 챙겨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곧 묵직한 무언가가 심청추의 오른손에 비비적거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달되었고, 심청추는 손끝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미지근한 액체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젠장, 젠장! 그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낙빙하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선제공격을 해올 줄은 몰랐다. 심청추는 두려운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낙빙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눈 끝이 붉게 달아올라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시무룩하게 내려앉아 있어 귀가 접힌 강아지의 귀를 연상시켰는데, 몸 뒤로 축 쳐진 꼬리도 덤으로 보이는 듯싶었다. 심청추는 이런 그의 모습에 끔찍이도 약했고,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내걸며 낙빙하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생일 축하를 허가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오직 우리 단둘이서만 축하할 것.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면 안 된다. 둘째, 비싼 선물은 하지 않을 것. 스승은 무조건 금액이 높은 것보다 마음이 담긴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셋째, 무슨 일이 있어도 솔직할 것. 축하받는 날에 거짓말을 듣고 싶지는 않구나.”
낙빙하는 조금 전까지 시냇물처럼 주륵주륵 흘리던 눈물을 단번에 그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심청추가 제시한 모든 사항 중에 그가 평소에 어기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낙빙하는 연인과의 오붓한 시간을 다른 사람한테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고, 심청추가 원하는 건 비싼 머리 장식 같은 게 아닐 거라고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물건을 원했더라면 진작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영석을 내다 팔아 돈을 마련했거나, 청탁을 받았을 테다. 마지막으로 거짓말하지 않는 건… 음, 조금 어긋났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킬 자신이 있었다.
낙빙하가 생각하는 바를 손바닥 뒤집듯이 잘 파악할 수 있는 심청추는 말을 잘 새겨듣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낙빙하의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을 마저 다 닦아 주고선 한숨을 쉬었다. 무슨 부탁이든 눈물을 보면 거절할 수가 없으니, 그가 가면 갈수록 낙빙하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낙빙하가 행복하다는 듯 응석을 부리며 그의 품에 안겨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덩치가 산만해지고, 목소리가 변성기를 겪어 굵어졌다 한들 그의 백련꽃은 백련꽃이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잎보다 다정한 시선, 여름날에 높게 뜬 해보다 환한 미소, 햇빛이 너른하게 창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아침에 사존, 하며 그를 깨우는 조심스러운 말투.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결국 심청추는 낙빙하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야지, 하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원작의 낙빙하에 비하면 그의 빙하는 아직 인생의 일 할도 살지 않았으니, 조금 더 받아줘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그가 단호하게 굴어서 낙빙하를 불안하게 만들기보다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낙빙하가 스스로 깨우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심청추는 주절주절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옆으로 삐져나온 낙빙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고, 이 행동에 낙빙하의 두 눈에서 폭포수처럼 흐르던 애정은 범람하기에 이르렀다.
“사존….”
그러한 사유로, 심청추는 해가 지고, 낙빙하가 저녁 준비를 하겠다며 앞치마를 두른 채로 방에서 나갔을 때에야 드디어 끊임없는 어리광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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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일인 9월 21일, 심청추는 낙빙하에게 줄 선물을 소매 안에 몰래 숨기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에는 미묘하게 옅은 기대가 서려 있었으나, 심청추는 이까지는 감추기 아니하였다. 이 일을 예상하지도 못한 낙빙하가 그의 표정을 ‘처음 연인에게서 축하를 받아 내심 기대하고 있는’ 상태로 해석되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왜 그의 생일인데 낙빙하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였냐고?
이유는 단순했다. 그동안 그들은 그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고, 낙빙하의 생일도 축하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그 기념일이 없는 셈 치고 대충 둘 다 어영부영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심청추는, 그의 생일이 축하받는 이상 낙빙하도 생일을 축하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낙빙하도, 심청추도, 그러니까 아무도 그의 생일을 몰랐다! 물론 무진대사에게 그가 소석안을 도왔던 날을 알려 달라 청한다면 정확한 낙빙하의 생일을 알 수 있겠지만, 그럴 능력이 차고 넘치는 낙빙하가 그의 생일을 알아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심청추는 낙빙하가 그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거라고 추측했다.
낙빙하는 말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빨래를 하는 여인일 뿐이고, 그를 기르고,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그의 스승뿐이라고. 심청추는 기꺼이 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고, 계속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여태껏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던 것이었다. 당사자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날을 꾸역꾸역 알아내서 축하하는 건 호의가 아닌 실례였다.
그렇다면 낙빙하의 의견을 존중해주면서 심청추가 그의 생일을 챙겨줄 수 있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심청추는 상당한 고심 끝에 이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낙빙하의 생일을 자신의 생일과 함께 보내는 것. 그가 낙빙하에게 제시한 세 번째 조건은 이러한 연유 때문에 제시되었던 것이었다. 낙빙하가 이렇게라도 축하받는 것이 불편하다면 바로 그에게 알려줄 수 있도록. 심청추는 겨울과 무관한 날에 낙빙하의 생일을 축하해줌에 따라, 낙빙하에게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이러하면 소석안이 낙빙하를 낳았다는 점보다는, 낙빙하가 태어났다는 것에 중심을 더 둘 수 있었으니까. 낙빙하가 그의 부모를 부정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낙빙하의 선택이었다. 그가 왈가왈부할 점이 아니었다.
본래 사람은 아무리 성찰한들 남이 그를 보는 것만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가 어렵다. 낙빙하가 심청추에게 그의 생일을 챙기고 싶다고 애원해왔다는 건 낙빙하가 생일이라는 기념일을 사사로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심청추는 자연스레 낙빙하의 생일을 사사로이 여길 수 없게 된다. 심청추는 가볍게 차를 훌쩍였다. 양팔을 들 때 느껴지는 한쪽 소매의 불균형함이 즐거우면서도 긴장되었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청추는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 너머에서 낙빙하의 목소리가 부탁했다.
“사존, 제자가 들어가기 전에 눈을 감아 주세요.”
긴장한 탓인지 낙빙하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심청추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함께 지낸 세월이 몇인데 고작 이런 것에 긴장하는지. 그는 순순히 낙빙하가 원하는 대로 눈을 감아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유롭기만 하다.
“그래, 스승은 준비가 되었구나.”
곧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청추는 시각을 차단해 한껏 예민해진 감각으로 낙빙하가 당궤 위에 무언가를 달칵, 하고 올려두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드르륵, 하고 의자가 가까이서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낙빙하가 무얼 준비한 건지 심청추가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따듯한 손이 그의 손을 덮어왔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심청추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케이크였다.
심청추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케이크. 서양 문물. 선협물인 《광오선마도》와 정말 거리가 먼, 생크림 케이크. 오프 더 레코드 씬이라며 무협 드라마의 배우들이 분장을 풀지 않은 채로 초록 빨대를 꽂은 스타x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웨이보 사진들만큼이나 이질적인 광경에 심청추는 눈을 비볐다. 그의 눈앞에 놓인 케이크는 생생했지만, 그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었다. 그가 다시 눈에서 손을 뗐을 때도, 케이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위에 올린 딸기는 무슨 작업을 거친 것인지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윤이 났고, 생크림은 갓 내린 눈보다 폭신폭신해 보였다.
낙빙하는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주섬주섬 얇은 초를 어디선가 꺼냈다. 그는 그것을 케이크 위에 꽂고 불을 붙였다. 열에 녹아내린 초의 윗등이 움푹 팼고, 심청추의 얼굴 위로 따스한 주황빛이 비쳤다. 언변이 능수능란하기로 유명한 청정봉주는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사존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심청추가 오랫동안 듣지 못했지만, 무척이나 익숙한 노래다. 낙빙하는 심청추에게 생일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생일을 생신으로 고쳐 불렀다. 심청추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낙빙하가 이렇게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는 것이 매우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만큼이나 낙빙하가 그의 이모저모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뜻이니까. 노래의 마지막 음절이 끝나자마자 낙빙하는 심청추의 손을 들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심청추가 여전히 눈을 깜박거리고 있기만 하자, 낙빙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존, 촛불을 끄셔야죠.”
“그, 그래. 촛불을 꺼야지.”
심청추는 낙빙하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가 후, 하고 촛불을 끄자, 낙빙하가 박수를 쳤다. 심청추의 예상과 달리, 박수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다가는 끝나질 않겠어! 심청추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낙빙하의 두 손을 잡고 그만해달라며 애원했고, 낙빙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낙빙하는 품속을 뒤적이더니, 꽃 한 송이를 편지처럼 보이는 종이 한 장과 함께 조심스럽게 건넸다.
“생신 축하드려요, 사존.”
심청추는 꽃과 편지를 받아들었다. 활짝 핀 흰 꽃에서는 마음이 편해지는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그가 편지를 읽기 위해 종이를 묶어둔 끈을 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낙빙하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편지는 혼자 계실 때 보시지요.”
낙빙하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심청추는 반쯤 풀었던 끈을 다시 단단히 묶고, 그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낙빙하의 앞에서 흔들었다. 그가 키운 낙빙하는 정말이지, 다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사춘기의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낙빙하는 부끄러운 듯 볼을 멋쩍게 긁으며 부연설명을 했다.
“사존의 고향에서는 꽃 백 송이를 건네면서 고백하는 게 정석이라고 들었는데, 제자는 사존께서 그런 거추장스러운 의식은 좋아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꽃 한 송이와… 아흔아홉 송이를 대신할 편지를 적어 왔어요.”
심청추는 가만히 얼굴 위로 접선을 펼쳤다. 정말 구식인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하는 대상이 낙빙하니 왠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낙빙하가 말하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분명 낙빙하의 뒤로는 따분할 정도로 평범한 죽사 벽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인데, 그가 그 말을 하자마자 사방으로 꽃잎이 휘날리며 물방울이 반짝거리는 효과가 보이는 듯했다. 심청추는 볼의 화끈거림을 애써 무마시키기 위해 낙빙하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 연애 초짜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네 사숙을 얼마나 괴롭힌 것이야.”
“별로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고향에서 생일을 어떻게 보내시는가에 대해 살짝 여쭤봤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것을 만드는 방법도 세세하게 알려 주었더냐?”
심청추는 접선으로 낙빙하의 머리를 콩 때렸지만,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자리 잡아 낙빙하의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낙빙하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그에게 물었다.
“케이크는 마음에 드십니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던가. 심청추는 스승의 명목상으로도 낙빙하에게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낙빙하가 요리에 재능이 있다지만 상상조차 못 할 음식을 설명만 듣고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터.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남주 버프가 있다지만, 낙빙하가 마음에 차는 케이크를 만들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쳤을지, 무슨 노력을 들였을지 그는 모른다. 심청추는 접선을 입가에 꾹 눌렀다.
“그건 맛을 봐야 알겠구나.”
“그렇다면, 제자가 지금 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지금이다. 심청추는 지금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적기임을 눈치채고, 낙빙하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
너의 사숙이 너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심청추의 명령조에 일어섰던 낙빙하가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두 사람은 재차 시선을 교환했고, 심청추는 심호흡을 한 번 마친 뒤, 낙빙하에게 물었다.
“스승이 생일을 축하해도 된다고 했을 때, 세 가지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 셋이 무엇이었지?”
낙빙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심청추의 질문에 답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게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비싼 선물을 하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솔직한 것입니다.”
“그래. 그 셋만 지키면 된다.”
심청추는 비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목이 죄이는 느낌이었다. 심청추는 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에는 아름답게 연꽃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는 모습이 양각으로 각인되어,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심청추는 그 상자를 케이크 옆에 올려두었다.
“사존, 그건…?”
“스승의 고향에서는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생일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란다.”
심청추는 낙빙하의 두 손을 잡았다. 낙빙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눈 속에서 수많은 물음표를 둥둥 띄우고 있었다. 심청추는 말을 이어갔다.
“너에게 내가 소중한 것처럼, 나에게도 네가 소중하단다. 네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널 사랑해. 그러니 네가 내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네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단다. 그렇지만 네가 그럴 수 있었음에도 굳이 네 생일을 알아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 이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으마.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낙빙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청추의 시선은 점점 미끄러지다, 마지막에는 맞잡고 있는 손에 머물렀다.
“빙하야, 나는 네가 태어나서 기쁘단다. 너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행복하단다. 그래서 태어난 걸 축하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에게 축하받는 걸 강요하고 싶지 않단다. 선택은 온전히 너의 몫이야.”
심청추는 낙빙하의 손에 상자를 쥐여주었다. 그가 물었다.
“너는 만약, 오늘 나에게서 생일 선물을 받는다면, 어떨 것 같느냐?”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즉각적인 대답을 바란 건 아니지만, 심청추는 애간장이 탔다. 오랫동안 꽁꽁 감춰두었던 마음을 전부 입 밖으로 내니 덜컥 후회가 들이닥쳤다. 그가 너무 이기利己를 부린 걸까? 그는 빙하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주었던 걸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성급하게 물어본 걸까? 과연 빙하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니다. 그래, 평생 이 문제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니 이전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어차피 오늘 물어보지 않았더라도 몇 년 후에, 몇 년 후가 아니더라도 몇십 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논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따지니 오히려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미리 물을 엎질러놓기 잘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허나 여전히 그 초조함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작게 달칵,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낙빙하가 상자를 연 것이다. 상자 안에는 옥가락지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낙빙하는 잠시 멈칫했다가, 심청추의 의도를 다분히 알아차린 듯 옥가락지 하나를 꺼내 심청추의 손에 조심스레 끼워 주었다. 심청추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옥가락지가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낙빙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제자는 사존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습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 베풀어주신 호의, 평생을 함께해주시겠다는 가약, 약주 한 병, 작은 나뭇잎 하나까지…. 한 번도 기쁘지 않은 적이 없었죠. 생일도 똑같습니다.”심청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낙빙하는 눈을 내리깔아 가락지가 끼워진 심청추의 손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빛바랜 일들을 천천히 더듬어가는 붉은 눈동자에서 따스한 반짝임이 일었다.
“그리고, 제자는 금일 내내 사존께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조했습니다.”
낙빙하는 심청추의 손에 다른 한 옥가락지를 쥐여 주었다. 심청추는 낙빙하가 했던 것처럼 그의 왼손 약지에 옥가락지를 끼워주었고, 그의 손이 떠나기도 전에 낙빙하의 손이 불쑥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들을 잇는 하나의 실처럼, 인연처럼. 낙빙하는 고개를 들었고, 심청추는 멍하니 입을 뗐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대로 모든 일이 완벽하게 풀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던 탓이리라.
“생일 축하한다, 빙하야.”
그는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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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빙하가 케이크를 자르겠다며 칼을 가지러 간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심청추는 원래 생일인 사람이 케이크를 자르는 이유를 대며 낙빙하와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그는 다소 어색한 기분으로 청자 그릇 위에 반듯하게 잘려 올려진 케이크를 젓가락으로 찔렀다. 낙빙하는 이 조그마한 차이도 놓치지 않고 심청추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맛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고향의 그 맛이 아니신가요?”
“겁도 많구나. 아직 입에 넣지도 않았건만. 그냥… 오랜만에 먹는 것이기도 하고, 원래 케이크를 먹을 때는 젓가락과 다른 식기를 썼는데, 처음 젓가락으로 먹으려고 하니 어색해서 그렇단다.”
“그렇다면 제자가 다음 생신에는 그 식기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심청추는 후후 웃으며 낙빙하를 쓰다듬어주었다.
“꼭 모든 게 고향의 것과 똑같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특별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스승은 이런 것도 마음에 드는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심청추는 수진 소설에 서양 문물을 더 이상 들여오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청추는 케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케이크는 생김새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빵은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웠고, 생크림도 혀에 닿자마자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딸기는 왜 윤기가 흐르나 싶었더니만, 낙빙하가 탕후루를 만들듯이 녹인 설탕을 과일 위로 얇게 두른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케이크는 심청추가 먹어본 그 어떤 케이크보다 맛있었다. 그의 형이 인심 좀 썼다며 5성 호텔 베이커리에서 어렵사리 사 왔다던 한정판 케이크보다 훨씬 더.
이 세계에는 오븐이 없으니, 향천타비기가 어지간히 고민해서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겠다 싶었다. 수고했으니까 나중에 빙하한테 부탁해서 한 조각 들고 가야지. 심청추는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고 케이크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낙빙하는 단 음식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런지, 아니면 케이크를 열심히 비워내는 심청추를 응시하느라 그런 것인지 아직 절반도 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심청추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낙빙하의 요리 솜씨를 칭찬했다.
“맛있구나.”
“처음 만드는 요리라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입니다.”
심청추는 낙빙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걱정할 게 무어가 있어? 스승은 네가 만든 요리가 맛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제자가 아직 실력이 미숙하였을 때, 반찬이 너무 싱겁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심청추는 부채를 허공에 저었다.
“그때는 네가 스승의 건강을 염려해서 과하게 조미료를 아꼈기 때문 아니냐. 밍밍하기는 했지만, 맛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낙빙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심청추의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그는 왼손을 올려 손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계속 황홀하게 쳐다보았는데,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본 심청추는 낙빙하에게 알맞은 가락지를 선택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원래 그는 일반적인 예물인 금가락지, 은가락지, 심지어 청혼의 정석이라는 보석이 박힌 가락지까지 생각해 보았으나, 금과 보석은 그가 제시한 조건에 걸렸기에 예외로 두었다. 그는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은가락지와 지금의 옥가락지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옥가락지를 선택했고, 이는 그들이 처음 만난 곳도 청정봉, 성친을 올린 곳도 청정봉이었기 때문이었다. 낙빙하가 계속 예물에서부터 눈을 떼지 못하자 심청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물이 나쁘지 않나 보구나.”
“네. 색이 청량하고 고아하니 사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보게 됩니다.”
청정봉을 닮은 가락지를 골랐으니, 이의 주인인 청정봉주와 닮았다는 말은 유별난 발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심청추는 발끝부터 귀끝까지 홧홧한 기분이 올라오는 듯했다. 그는 접선을 펼쳐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낙빙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심청추에게 더더욱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사존을 닮은 물건보다는, 사존이 좋습니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하루 내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솔직해야 한다고 명하신 분은 사존이 아니십니까.”
심청추는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역시 그가 낙빙하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 낙빙하가 시선을 애써 요리조리 피하고 있는 심청추에게 안겨 왔다. 심청추의 가슴에 낙빙하의 머리가 닿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청추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낙빙하가 칭얼거렸다.
“사존, 제자는 다음 생일에 사존께서 만들어주신 케이크가 먹고 싶습니다.”
“그래, 그래. 만들어주마.”
“생일 노래도 듣고 싶어요.”
“그건 지금도 불러줄 수 있다.”
낙빙하가 고개를 저었다. 심청추는 낙빙하가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하여, 그에게 왜 지금 듣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낙빙하는 그의 생각보다 단순명료한 답을 내었다.
“상 사숙께서 노래는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부르는 것이 옳은 절차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심청추는 알겠다며, 이를 꼭 기억해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낙빙하는 기쁜 목소리로, 사존께서는 제자에게 너무나도 잘해주신다고 했다. 심청추는 눈썹을 내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
평화로운 오후다. 밖에서는 댓잎이 서로를 쓸어내며 사르륵 소리를 내고 있고, 하늘은 더할 것 없이 푸르렀다. 그의 손에 끼인 옥가락지 때문에 배겨서 아플 법도 한데, 낙빙하는 끝까지 깍지를 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심청추는 애정해 마지않는 낙빙하의 볼을 쓸어주며 고민했다. 내년에는 빙하에게 무슨 선물을 해주는 게 좋을까?
두 사람의 생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