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정봉에서 사존 심청추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심청추가 개인사를 비롯한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애당초 그들은 사적인 감정교류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심청추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명범이 심청추의 곁을 지켰으나, 그도 문하생들이 사존의 의중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던 사존이 변했다.
그들의 사존이 유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게 벌써 두 해 전 일이다. 누구의 교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게 문을 닫고 있던 청정봉이 점차 다른 봉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 시기도 그때부터였다.
달라진 심청추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다른 봉주들과 원활한 교류를 했다. 선주봉주의 술 대작에 참여하기도 하고, 백전봉과 청정봉의 합동훈련도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이 변화가 얼떨떨했던 청정봉의 문하생들은 곧 언제 어색했냐는 듯 금세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변화는 청정봉에 따뜻한 봄바람을 일게 했다. 사형, 사저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불러도 결속 관계가 약한 편이었던 청정봉의 내부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낙빙하 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괴롭히는 경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같은 문하생들끼리 낙빙하를 무시하는 경향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주쳐도 부딪히지 않은 채 지나가거나 고갯짓으로 아는 체를 하고 지나가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백전봉만큼은 아니어도 청정봉 안에서도 실력주의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이를 권력 구도로 보기엔 많은 무리가 있지만, 같은 문하생이어도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능한 실력 있는 이들을 존경하는 면모는 옛적부터 존재해왔다.
대대로 백전봉이 나이를 따지지 않는 철저한 실력주의였다면, 청정봉은 상대의 지식과 노력 같은 섬세한 영역에서 상대를 평가하는 부분이 있었다. 청정봉 내 서고의 모든 책을 읽는 것이 청정봉주가 되는 기본 조건인 것처럼, 그들은 앎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이 낙빙하를 인정한 건 단순히 사존이 낙빙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닌 낙빙하 본인이 무리에서 군계일학이 될 정도로 크게 성장한 것에 있었다.
처음 낙빙하의 실력이 얼마나 볼썽사나웠는지를 기억하는 그들은 낙빙하가 지금의 실력을 갖추기까지 한 노력을 인정했다. 기실 낙빙하를 그들이 인정하냐 마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존이 인정했는데 그들이 인정했네, 마네 해도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바뀐 심청추로선 낙빙하가 이것저것 자신을 챙겨주기를 좋아하는 데다 실력도 좋아 ‘편하네.’라는 가벼운 감상으로 내버려 둔 거지만, 남들이 보기엔 달랐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이전에 명범이 심청추를 믿고 행동했을 때처럼 이번엔 그 권력이 낙빙하에게 옮겨간 것으로 보였다.
이전까지 청정봉주의 수발을 드는 건 대사형인 명범만이 해왔다. 그걸 가장 하찮게 봤던 낙빙하가 하게 된다는 건 약간의 충격이었다.
녕영영이야 보라며 우리 아낙이 이토록 대단하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명범은 이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낙빙하가 하는 일들을 저도 잘할 수 있다며 고스란히 따라 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원작 광오선마도의 남자 주인공 낙빙하는 향천타비기 공인, 모든 게 몰빵된 천재다. 심청추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심화로 응용해, 일 처리를 편하게 할 방식까지 마련한다. 천재도 범재도 아닌 그저 수재일 뿐인 명범이 그런 낙빙하를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렇게 일이 굴러가니 명범을 제외한 모두가 낙빙하를 자신들과 똑같은 ‘청정봉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명범도 머리로는 낙빙하를 인정했지만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단번에 변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랄까. 그는 나이도 많고 낙빙하보다 일찍 수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수련의 성취가 낙빙하에게 따라잡힌 거로도 모자라 영원히 그를 잡지 못할 정도가 된 거다.
그는 낙빙하가 만검봉에서 그가 갖고 싶어 하던 정양(正陽)을 뽑을 때에야 낙빙하를 축하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질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 낙빙하의 등만 쳐다보는 자신을 미워하겠지. 그러나 그는 대사형으로서 추잡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요즈음 낙빙하는 그가 살아온 시간 중에 제일 행복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엔 다른 사형이 시키는 궂은일을 하느라 몸이 두 개여도 부족했는데 이젠 그것도 없다. 진심으로 사존을 모시고, 수련과 정진에만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됐다.
제대로 된 방과 편안한 잠자리에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붙잡고, 자신이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지 설레하던 아이는 어느덧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고 있었다.
지난 과거들은 낙빙하가 고개를 숙이고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알갱이가 작아져 있었다. 어린 날 그를 상처 입히던 것들은 더는 그를 아프게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오늘을 위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게 아녔으면 사존을 모시기에 부족한 모습만 보였겠지. 몇 달 간 ‘평범한 일상’이 무엇인지를 낙빙하도 알게 되었다.
행복이 계속되면 분명 걱정거리라는 건 없을 줄로만 알았다다만 그런 낙빙하에게도 말 못 할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눈앞의 창이었다.
[ !! 돌발 퀘스트 !! ]
[SYSTEM : 지친 사존을 달래주세요!]
[보상: 사존 ‘심청추’의 웃음과 칭찬. 상황에 따라 히든 보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한 달 전부터 나타난 정체불명의 이것.
처음엔 보상이란 건 뜨지도 않고 수락하겠냐는 선택지만 있었다. 허깨비처럼 기괴한 이 창이 떴을 때 낙빙하는 몽염이 저를 농락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허상을 실제처럼 만들 수 있는 건 그가 생각했을 때 몽염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는 몽염을 그 실력만은 확실히 인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낙빙하의 인생에서 스승은 청정봉주 심청추 한 사람뿐이었다. 지금은 이전의 과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장성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제 과거를 본의 아니게 사존에게 보였다. 거기에다가 자신을 지켜준 사존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은 게 몽염이다. 지금은 사존께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낙빙하가 그 빚을 잊지 않았다.
저 창이 뜬 날 낙빙하가 먼저 한 건 꿈에서 몽염을 추궁한 거였다. 다만 몽염의 반응은 좀 이상했다.
‘이 노부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그건 노부도 모르는 일이다.’
낙빙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동안 몽염에게서 배웠던 응용방식으로 직접 자신이 본 ‘창’을 만들어 냈지만 무슨 일인지 몽염이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은 완벽했다. 그러나 ‘창’에 적힌 내용과 겉의 형체 중 그 무엇도 몽염이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몇 차례를 시도했을 때 알 수 있던 건 창에 적힌 내용은 공백으로 무엇도 적히지 않은 게 된단 거고, 낙빙하가 만들어 낸 꿈속의 창은 때때로 ‘만들어 내지 않은 것’으로 형체 자체가 지워진단 점이었다.
일이 이리되자 그는 몇 주간 이 정체불명의 ‘창’에 대해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마족 중 환상을 만들어 내는 데 일인자인 몽염조차 모르는 생명체가 있다. 몽염을 통해 마족의 생리를 들었지만, 낙빙하를 만나기까지 몽염도 도망자처럼 자칫 잘못하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낙빙하에게 붙어있던 시간 동안 그가 모르는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것이 그의 ‘사존’을 걸고넘어졌으니 도저히 무심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돌발 퀘스트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 창은 낙빙하가 자고 일어났을 때나 움직일 때나 수련을 할 때나 수업을 들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걸 없애려면 ‘퀘스트’의 거절을 누르면 되는 건가? 하지만 시도해본 적도 없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곧장 누를 수가 없었다. 누르면 정말 사라지는 건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되는 건지. 현재 알 수 있는 정보가 지나치게 없었다.
사존에게 묻는다면 무언가 달라질까 싶지만 몽염에게 그랬듯 어떤 말도 전달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낙빙하를 망설이게 만드는 건 이거였다.
‘사존이 지치셨다고?’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의 사존에 대해서는 낙빙하도 2년간의 관찰 끝에 간신히 알게 되었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 어떤 습관을 보이는지, 무슨 간식을 좋아하는지. 입맛이 어디가 취향인지. 기분을 숨기고 싶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의 사존이 무얼 원하는지.
하지만 천하의 낙빙하도 아직까진 자신이 완벽하게 사존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사존 심청추는 낙빙하에게조차 제 개인사나 심정을 말해준 적이 없다. 사존께서 직접적인 언급을 할 때는 그가 만든 부족한 식사의 평가 때 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악기를 다룰 때 어색한 자세로 이상한 소리를 낼 때나 검술에서의 틀린 자세에서나. 그를 염려하는 말을 건넬 때뿐일까.
대체로 그의 부족함만을 탓할 때뿐인 듯했지만 현재 그런 잔 실수도 점차 줄어들어 칭찬을 더 많이 듣는 편이었다. 이것도 그동안 함께 한 시간이 있기에 가능했다. 말하지 않아도 심청추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낙빙하가 평소 그를 틈틈이 살피고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해본 바로는 이 괴상한 것을 무시하기엔 확실히 낙빙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최근 사존께서 홀로 청정봉을 돌아다니며 사색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늘어나고 있었다. 이게 이 해괴한 허깨비(시스템 창)가 말하는 것처럼 사존께서 지쳐서 그런 거라면?
눈앞의 창은 어느 때고 둥둥 떠 있었다. 가끔 그를 놀리듯 사라졌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나타났다. 그 새 낙빙하는 정식임무를 받아 산 아래로 나갔다가 오기도 했고, 매일 사존이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도 색다르게 진상해봤다. 그럼에도 이 창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락과 거절 중 무엇도 누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창 자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그의 사존께서 ‘아직도’ 지쳐있기 때문이겠지. 퀘스트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돌발성’이란 단어 뜻 그대로 파악해보면 원인이 해결되면 이것도 사라진단 말이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대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가시던 사존께서 ‘앞으로 자신이 산책을 나설 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 구태여 따라올 필요 없다.’라고 낙빙하에게 언질을 준 참이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도 이것이 말한 대로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게 낙빙하가 시스템의 돌발성 퀘스트를 받아들인 이유였다.
***
“사존, 제자가 새로운 요리를 개발해봤습니다.”
“사존, 새로운 법술을 배우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저번에 사존께서 보여주셨던 것 중에…….”
“여기 시조에서 진천 아가씨는 진(晉)의 두도의 처를 말하는 것일 텐데, 어찌하여 소혜 아가씨를 진천녀로 빗대었는지 제자가 아둔하여 여즉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존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사존, 여길 보세요! 이제 기마술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선주봉에서 새 옷감이 왔습니다. 사형과 다른 문하생들이 부탁한 것이 맞는지 확인 후 저번과 같이 깨끗한 공간에 옮겨뒀습니다.”
“백전봉과 궁정봉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바로 답장하실 건가요?”
낙빙하는 최선을 다했다.
평소보다도 사존을 따라다니며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붙어있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썼다.
심청추는 낙빙하가 무언가 하나라도 해내면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는 편이었다. 모진 말을 했던 적도 있지만 그건 전부 자신이 미숙했을 때의 일이다.
벌써 여러 달 동안 반복된 행동으로 낙빙하는 사존이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그건 난데없이 마족이 궁정봉에 걸린 글귀를 전리품으로 받아가겠다고 난동을 부렸을 때 심청추가 외팔이 장로에게서 저를 지키기 위해 직접 몸으로 막은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술법도, 검술 수련도, 악기를 다루는 것도, 옛 성현의 시조를 알아가는 것들도 제대로 공을 들여 조금이라도 해낸다면 사존께선 칭찬해주셨다. 그가 힘을 낼수록 사존께서 저를 보며 짓는 미소가 늘어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으며 그를 다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존이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실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부끄럽지만 낙빙하는 자신의 얼굴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는 경험으로 깨달은 일이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길거리의 개처럼 처량하게 돌아다니던 불우한 시절도 있었지만 그를 거둔 양모와 있을 때 낙빙하는 이 용모의 득을 본 적이 있다.
병이 든 양모가 끝내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자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거리를 달라며 돌아다녔다. 어린 아이에게 일을 줄 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낙빙하는 모래사막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처럼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제 어미에게 죽 한 모금이라도 먹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양모를 살리기 위해선 약이 필요했고, 그 약을 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이전까지 양모가 열심히 번 돈을 약값으로 썼지만, 병이란 게 다 그렇듯 대번에 빠른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비싸기까지 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자는 식비를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하지만 약도 먹을 걸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몸에 쓰면 오히려 독이 된다. 병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약은 독한 성분이 들어간다. 따라서 이런 약을 먹고 버티려면 기본적으로 음식 섭취가 어느 정도 돼 있는 몸이어야 했다.
나아져야 하는 몸은 먹은 것이 없다. 거기에 아무리 먹으면 나아진다고 독한 약을 부어봤자 밑 빠진 둑에 물 붓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걸 그의 어미는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른다.
그의 양모는 항상 웃으면 낙빙하가 들고 온 약을 고맙다며 마셨기에 낙빙하로선 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아이는 순수하고 무지했다. 누구도 그에게 기초적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약이란 응당 좋은 것이니 먹으면 무조건 나을 수 있다며 희망만 품었다. 그의 어머니가 어느 날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 그는 계속 상황이 나아질 거라 믿고, 어머니와 그가 어느 집 아이들처럼 같이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으리란 꿈을 꿨다.
끝까지 어미는 어느 순간 그에게 다 나았단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약을 살 그 돈으로 차라리 약이 아닌 네가 먹을 간식을 사라고.
그녀가 거짓말을 입에 담은 건, 낙빙하를 처음 만났을 적처럼 이 아이만은 두 번 다시 굶게 하고 싶지 않은 부모의 욕심에서였다. 그게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어도, 세상 누구도 제 아이의 굶주린 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낙빙하가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뒤늦게 작금의 상황이 약만 갖고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이번엔 일이 아닌 먹을 걸 달라는 소리를 위해서였다. 타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자존심을 버린 채 구걸하는 것보다 그의 어머니가 죽고 혼자 남게 될 미래가 더 두려웠다.
그때 그를 가엾어하며 먹을 걸 주던 이들 전부가 다 그의 외모만 보고 그에게 다가온 자들이었다. 과거 동냥을 하고 다녔을 때 여타 다른 아이들에게 맞았던 이유도 그가 이 얼굴 덕을 봐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 시샘을 받아서이니 이 얼굴의 효과는 그토록 탁월했다 할 수 있겠지.
그들이 한 말을 낙빙하는 빠짐없이 기억한다. “잘생겼다.”라거나, “귀엽게 생겼다.”라거나. 개중 부잣집 나이든 주인마님은 낙빙하의 얼굴만 보고 자신의 시종인이 되지 않겠냐며 음습한 뜻을 품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주로 이 얼굴에 반응했던 건 하나같이 여성들이고 사내들은 저를 미워하기 바빴다. 청정봉에서도 녕영영을 비롯한 몇몇 사저를 제외하고 다른 사형들은 전부 그를 싫어하지 않았나. 비록 그의 사존이 저를 미워하거나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찌될지 모른다. 낙빙하는 사존이 저를 미워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최대한 못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가 준 약도 열심히 바르고, 몸가짐도 깨끗하게 하고 다녔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머리도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다듬고 어여쁘게 보이기 위해 최대한 힘 썼다.
이런 그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한 걸까? 녕 사저가 장난으로 만들어준 화관을 머리에 계속 쓰고 있던 걸 까먹고 사존을 뵈러 갔을 때, 그런 어리숙하고 못난 모습을 사존께 들켜버렸는데 그때 사존께선 그를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워하던 그에게 괜찮다 말하고는 화관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예쁘구나. 나비가 꽃을 봐야 할지, 널 보고 꽃이라 할지 착각할 정도야.”라는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다!
이는 낙빙하의 인생 일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크나큰 사건이자 전환점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사존께서 무려 ‘예쁘다.’라고 말해주셨다. 두 번 강조한다. 저를 꽃 같다고 말해주셨다! 사존께선 그를 싫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어하지 않으셨던 거다.
이런 경우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의 사존은 그를 놀리는 게 재미있던 건지 아니면 그가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이 붉어진 홍시같은 얼굴을 하는 걸 좋아하는 건지 낙빙하의 외모를 칭찬하기 바빴다. 그때마다 낙빙하는 벌게진 얼굴을 수습하기에 정신없었다.
언제고 못난 모습을 보이면 사존께서 이전처럼 돌아가 차갑게 저를 내칠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던 낙빙하가 조금씩 당당해진 건 심청추 덕택이었다. 헌신적일 정도로 올곧은 사랑을 받은 낙빙하가 갖게 된 건 자신감이었다. 사존께선 자신을 좋아한다. 매우 예뻐라 하신다. 사존이 제 어떤 모습도 싫어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낙빙하는 어느덧 사존의 농을 똑같이 유들유들 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되받아침도 사존은 “네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라며 기꺼워했지. 근심 걱정 없이 평범한 아이처럼 긴 시간 사랑만 받아본 적이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낙빙하는, 심청추에게 자연히 갚아야 할 빚만 느는 셈이었다.
그동안 저를 보고 사존이 웃어줬듯 낙빙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힘내서 뛰어다니고 자주 얼굴을 비추면 사존의 기분이 풀어지리라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좋아한다는 걸 제외하고서라도 낙빙하는 심청추를 보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사는 사람이었으니, 그게 무슨 이유이든 그의 사존이 지쳤다면 저를 보고 한결 나아지실 거라 판단했다. 좁은 시각에서 나온 생각이었지만 근 2년간의 행적이 그러했으니 완전히 틀렸다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효과는 미미했다. 평소보다 자주 얼굴을 비추고 요 며칠 끊이질 않는 질문을 들고 오는 낙빙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부채로 입을 가린 심청추가 냉정하게 말했다.
“빙하야.”
“네, 사존!”
“이토록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니 이 사존도 무척 기쁘지만… 전부 혼자서 깨우칠 수 있는 것들인 것 같구나. 요리와 사숙들의 편지는 여기에 두고 가고, 지금부터 서고 열쇠를 줄 터이니 청정봉을 돌고 난 후 네가 질문한 것들을 직접 서적으로 찾아보아라. 기마술은 전보다 늘었구나. 잘했다.”
이상하다. 분명 칭찬을 들었는데, 사존께서 저를 보았는데…….
시스템 창의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낙빙하를 놀리듯 창이 작게 깜빡거리며 이전에 보여줬던 구절을 다시 보여줬다.
[SYSTEM: 지친 사존을 달래주세요!]
…아니다. 뒤에 새로운 한 구절이 새로 쓰여 있었다.
[현재 사존 청정봉주 심청추는 피곤함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분발해주세요!]
쿠궁.
그는 자신이 사존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 데다 저를 보고 어떤 기분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현기증으로 몸을 비틀거릴 뻔한 걸 간신히 참고 버티자 시스템이 빛을 발하며 반짝거렸다.
[충격으로 정신력 –100 감소. 감수성 수치가 +300 상승]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없던 그라도 방금의 저 수치상승이 제게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
결국 마음의 상처만 얻고 돌아온 낙빙하는 사존이 명령한 바를 하기 위해 우선 뛰어야만 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어느덧 익숙해진 청정봉 주변을 평소처럼 20바퀴째 돌고 사존께서 주신 열쇠로 서고를 연다. 늘상 사존이 앉으시는 자리 바로 건너편에 자리를 잡아 참고할 서적들을 여러 권 쌓아둔 그는 방금 잡은 책 페이지를 아무렇지 않게 펼치고 한 장씩 뒤로 넘겼다.
그렇게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세 페이지……. 꽤 의연한 모습으로 책의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 위로 머리를 박아버렸다.
“어째서…….”
사존 제자의 얼굴로는 이제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요?
차라리 사존이 아름다운 여성들을 쳐다보거나 그들과 함께 있는 게 나은 것 같았다. 낙빙하는 비탄과 절망에 빠져 우는 목소리를 냈다. 선주봉주 제사숙과 사존이 나란히 있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작년에 사존과 둘이서 선주봉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낙빙하의 키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 아무리 선주봉에서 옷을 보내와도 이전 옷들이 짧은 주기로 맞지 않게 돼서였다. 낙빙하의 옷만 짧은 주기로 도대체 몇 벌을 만드는건지. 이에 학을 뗀 선주봉주는 결국 문제의 제자와 한번쯤 선주봉에 들르라는 권유-라고 쓰고 명령이라 읽는다-를 했다.
치수를 재기 위해 선주봉의 여타 다른 문하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간신히 풀려난 그는 사존이 계속 선주봉의 문하생들을 쳐다보고 있던 게 기억났다. 사존께서 자신만 보면 좋을 텐데, 괜히 사존이 저 중 마음에 든 여인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과히 심청추가 경악할만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그는 몹시 슬퍼졌다.
심청추는 그저 이 세계에서 정파의 성녀이자 절세미인이란 소릴 듣는 류명연의 얼굴을 지금이라면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유심히 살핀 거지만 낙빙하가 이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나중에 돌아가는 길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낙빙하를 여러 번 치수를 재고 천을 덧대는 게 힘들었던 걸까 무심코 생각한 심청추가 낙빙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오늘도 수고했다. 착하구나.”하고 칭찬해주지 않았다면 낙빙하는 여러 날을 우울했을 거다. 사존께선 그날을 전부 잊으신 걸까?
안돼 낙빙하. 사존께 멋진 모습을 보여야지. 사존을 지켜드리겠다고 약속했잖아.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사존께선 항상 날 보고 최고라 하셨어. 이번의 문제를 해결하면 사존께선 괜찮아지실 거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포기할 셈이야? 이유를 모르지만 사존께서 힘들어하시는데 나는…….
사존께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반듯이 했으나 시무룩해진 표정만은 어떻게 해도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싱숭생숭하고 어찌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반성하잔 의미로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내리쳤다.
‘당장 눈앞의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데 이 꼴로 어찌 사존의 곁에 설 수 있겠어? 힘내자. 할 수 있어.’하고 눈을 부릅뜨고 나서야 집중할 수 있었다. 사존께서 낸 숙제를 우선 해결해야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있다. 사존께서 괜찮아질 수 있다면 난 괜찮아. 좀 더 노력하자. 아직 손가락 열 개를 넘어설 정도로 실패하진 않았잖아. 충격으로 혼란이었던 머릿속은 그제야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깐, 저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사존께서 주신 일을 해내고 나서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을 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래도 해내야 하지만. 쌓아둔 서고의 책을 앉아 읽기 시작하자 한곳으로만 빙빙 회오리처럼 맴돌던 생각은 급격하게 다른 곳으로 흘러 더는 막히지 않았다.
낙빙하의 집중력은 대단한 편이었다. 그는 하나에 몰두하면 그게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청정봉에서 빠른 두각을 낼 수 있던 것도 재능과 의욕이 뒷받침되어서가 맞지만, 이런 집중력의 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고는 한참이나 조용했다. 창 너머로 가끔 사람 목소리와 웃음소리, 수련하는 듯 보이는 기합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어렴풋 들렸다. 언제라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평화는 낙빙하의 바로 지척에 있다. 어둠과 빛 사이 중간에 서 있는 낙빙하가 어두운 서고에 햇살이 내려앉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웃었다.
그는 역시, 이 하나뿐인 행복을 선물로 안겨준 사존이 좋았다. 자신에게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걸 선물해준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가 무엇이든 정말 마음을 쓰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가 더 크게 자라 그 속의 어둠을 전부 몰아낼 수 있을 때까지. 모자란 자신의 곁에서라도 사존이 더 많이 웃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낙빙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기꺼이 될 수 있었다.
[퀘스트 진행도 NOW LOADING ■□□□□ ……. ]
[피로도 100포인트를 지불하고 ‘찬스 1회권’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대뜸 나타나서 묻는 시스템의 질문은 참 뜬금없었지만 착실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저기 알 수 없는 글자로 적힌 건 뭐고, 피로도라는 건 무엇이며 찬스 1회권은 뭐지?
도무지 어디서부터 뭘 질문하면 좋을지 몰랐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당황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면 안 된다. 그게 상대에게 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단다.”라는 조언을 해줬던 심청추의 말이 떠올라 그는 최대한 속내를 숨겼다.
몇 초간 돌처럼 멈춰있던 그는 순간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피로도니 감수성이니 정신력이니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특유의 눈치로 아예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자신과 사존이 이것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게 아닐까란 부분이었다.
아까 정신력이 깎이고 감수성이 올라간단 소릴 들었을 때 정말 충격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빠르게 감정에 휩쓸렸다. 사존께서 영문 모를 일로 힘들어하시는 게 이것 때문이면?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건 가능성일 뿐,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달려나간 생각이 짧은 사이에 수천 갈래의 가능성의 궤도로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예컨대 시스템에 의해 기분이 하락하게 된다면 이게 장기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이 창은 대상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는 거로 보인다. 자신할 수 없지만 적당히 기류를 읽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지. 그게 아니면 진행도라는 칸 모양과 본인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저런 말을 시기적절하게 내뱉을 리가 없다.
낙빙하는 하나의 도박을 입에 담아보기로 했다. 단지 의심일 뿐이었지만, 아주 작은 단서만 얻는다면 곧 심증이 아닌 확신이 가능할 것들이기도 했다.
“혹시 사존께서 널 알고 있어?”
이미 그는 이것이 제 말에 답을 할 수 있는 것이란 걸 대략 눈치챘다. 다만 질문하지 않았던 건 상대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낙빙하가 확실하게 얻고 싶은 답은 시작부터 하나였다. 이 시스템이 사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청추를 위해 움직인다, 라는 사실 뿐. 이것이 제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거나 하지 않든 그건 상관없었다.
낙빙하는 솔직히 될 수 있으면 이런 질문을 피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듣는다면 심청추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알아내는 것들이 정녕 심청추의 비밀이라면 나중에 이것들을 그가 알고 있었다 했을 때 그의 사존이 제게 보일 표정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사존에게 말하지 못한 하나의 비밀을 만들었다. 몸에 흐르는 마기를 제어하기 위해서란 이유로 몽염에게서 그의 술법을 배우지 않았던가. 언젠가 그게 어느 날이 되었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말할 날이 오겠지.
언젠가 그의 사존이 그에게 말했듯 이런 마도를 배워 쓰게 되더라도 자신은 정파의 길을 걸을 테니 사존께선 자신을 믿어주시겠지. 괜찮다. 괜찮을 거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몽염에게 배울 것이 없는 실력까지 올랐는데도 그는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늦지 않게 말해야 한다. 그걸 낙빙하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중요한 건, 낙빙하가 방금의 것 이상으로 심청추에게 또다른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단 점이었다.
낙빙하도 모르지 않았다. 이 청정봉에서 낙빙하는 누구보다도 심청추와 함께 한 시간이 긴 사람이었다. 가끔 심청추가 허공에 시선을 오래 두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지만 간간이 원인 모를 웃음을 짓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속삭이는 음성을 듣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의 사존은 차가운 듯 보이지만 솔직한 사람이다.
처음엔 그것이 단지 사존께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일어나는 혼잣말인 줄 알았다. 가끔 엉뚱한 구석이 있는 그의 사존은 알 수 없는 노래나 가락을 흥얼거리거나 모르는 단어를 말하며 먹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고 하는 말들이 아녔다. 도리어 사존은 그것들을 타인이 들었을까 뒤늦게 아차하여 부채로 입을 가리고 그들을 살피는 구석이 있었다.
한때는 그게 사존께서 품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해서 부끄러워 그런 줄 알았다. 제자들에게 엉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고,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게다가 낙빙하도 가끔 기운이 없거나 반드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경우 혼잣말을 종종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때도 ‘시스템’이 저에게 그러했듯 사존에게 말을 건 거라면?
좀 더 이상한 부분을 생각하면 더 있다. 예를 들어 박피마에게 녕영영이 납치되었을 때 심청추를 비롯해 그들은 전부 볼썽사납게 묶여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대들보가 무너질 것이란 걸 누가 알았을까. 어린 자신은 사존께서 알 수 없는 수를 썼다고만 생각했다.
사존의 현 심정을 어떤 식으로든 파악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 사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 과연 사존을 알고 있어서라면? 그리고 이것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지금 사존에게 ‘관여’를 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사존의 상태로 도움이 필요해 자신에게 손을 뻗은 거라면?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마음만 먹는다면 더 깊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존을 곤란하게 만들 순 없었다.
시스템은 ‘…….’ 한 창만 띄우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총괄 에너지원인 낙빙하에게 접촉한 이유는 말 그대로 플레이어 심청추를 위해서다. 이 <광오선마도> 세계에서 가장 짙게 플레이어가 애착을 보이는 상대가 있다면 바로 공교롭게도 눈앞의 총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그야 심청추, 즉 심원의 최애가 낙빙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들은 플레이어를 위해 이 세계에 있으면서 좋은 기억을 심어줄 의무가 있었다. 플레이어의 정신상태가 현재 불균형한 것도 맞기 때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눈앞의 총에너지원과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이 일련의 행동들은 플레이어를 위한 애프터케어 서비스, 일명 A/S라 불리는 그것이다. 그들은 낙빙하가 자신들에 대해 알게 될 것보다 이 <광오선마도> 세계에 들어오게 된 플레이어 ‘심청추’를 지킬 의무를 선택했다. <광오선마도>의 주인공인 낙빙하에 대해서 전체적인 스토리를 꿰고 있는 만큼 시스템도 낙빙하란 캐릭터에 대해 아예 모르진 않았다. 하나 더 말하면, 그들이야말로 심청추보다 현재의 낙빙하를 더 잘 꿰뚫고 있었다. 그게 아녔으면 의무를 떠나서라도 시스템도 쉽사리 낙빙하에게 말을 걸진 않았을 거다.
[본 시스템은 ‘YOU CAN YOU UP, NO CAN NO BB’를 개발 이념으로 삼았으며 최상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심청추가 들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낙빙하에게 있어 이보다 확실한 답은 없었다.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낙빙하는 저 문장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싶던 건 이해 못 할 말이 아닌 ‘서비스를 받을 대상’과 ‘시스템의 목적’이었지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는 시스템을 향해 말했다.
“찬스 1회권을 사용하겠어.”
시스템은 그가 퀘스트를 성공하기까지 도움을 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혼자 해낼 수 있으면 좋았지만 지금 그러지 못해 이 지경이 되었지 않나. 아주 조금의 힌트라도 좋았다. 일단 뭔지 몰라도 사존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게 하나 정도 나온다면, 나머진 낙빙하가 열심히 하면 될 것들이다.
아무래도 이 ‘찬스’라는 것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빙글빙글 ‘돌려돌려 돌림판’ 같은 판이 돌아간다. 동그란 원판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걸 보고 낙빙하는 적당히 시스템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고심하다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멈춰.”라는 말을 해본다. 그러자 시스템은 돌아가던 돌림판을 멈췄다.
전부 ???로 되어있는 선택지 중 한 곳에 화살표가 멈추고, 도대체 뭐가 걸린지 몰라 눈을 가늘게 뜬 낙빙하에게 시스템이 빠라바라밤 신난 효과음을 내었다.
[축하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지금부터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력자?
그 조력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아 모르지만 이 청정봉에서 사존을 제외하고 그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한다면야…….
멍하니 창을 쳐다보며 ‘설마’하고 있던 그의 귀로 갑자기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낙! 어디 있어?”
시스템의 창은 거기서 사라졌다. 낙빙하는 설마하던 조력자가 그녀인 점에서 감사해야 할 건지, 때마침 녕영영이 저를 찾는다는 점에서 시스템이 이것까지 예정했던 건지 참 혼란스러웠다. 그는 당황스러웠으나 경황없이 서 있는 것보다 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녕영영이 그를 도와줄 조력자가 맞다면 여기서 그녈 놓친다면 그는 새로이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간 낙빙하가 문을 살짝 밀어 얼굴을 내밀었다.
“사저, 무슨 일이야?”
“아낙? 뭐야 엄청나게 찾았어. 여기 있었구나!”
녕영영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 후다닥 낙빙하가 열어둔 문 안으로 들어왔다.
후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서고 안을 두리번거렸다. 애초에 낙빙하밖에 없었던 서고는 조용하기만 해, 특별할 것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책들이 쌓여있는 곳이 방금까지 낙빙하가 앉았던 곳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자리 잡은 그녀는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쭉 뻗으며 책상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저를 왜 찾았는지 대답을 피하는 그녀에 낙빙하는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녕영영에게 약간 물렀다. 사저로 인해 사형들과의 관계에서 곤란했던 적도 많고, 힘들었던 적도 많지만 그럼에도 이 청정봉에서 그를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사존 다음으로 녕영영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사존께서 저를 아낀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그는 이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근래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기도 했지. 원래 대화란 게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이뤄지는 거지 않는가.
녕영영이 그를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녔는데, 무슨 일이냐 묻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제 자리로 걸었다. 그러던 사이 책상에 코를 박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누워있던 녕영영이 약간 얼굴을 들고는 베시시 웃었다.
“오늘 온종일 아낙이 잘 보이지 않아서 대사형이 또 괴롭힌 줄 알았지.”
“이제 난 대사형에게 당하지 않는데도?”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싱글벙글 꽃받침을 하고 낙빙하를 쳐다보던 녕영영이 장난스럽게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내 여기서 책 읽고 있던 거야?”
“그건 아니야. 잠시 사존께서 숙제를 내주셔서 그걸 하고 있었어.”
“에?!”
과거라면 금방이라도 입에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라는 말을 담았을 그녀였지만 낙빙하처럼 그녀도 성장했다. 사존께서 낙빙하에게만 숙제를 냈다는 말에 녕영영은 볼을 빵빵 부풀리며 입만 삐죽거렸다.
“사존도 너무하시지. 아낙이랑만 일 대 일 수업을 해주시잖아.”
“그건 아니야, 사저. 사존께선…….”
녕영영에게 어떻게 이걸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낙빙하가 끙 앓는 소릴 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 이번엔.”
“잘못이라면 뭘?”
“사존께서 요 며칠 기운이 없어 보이셨거든.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고 사존의 마음을 듣고 싶어 사존을 귀찮게 했어.”
“그래서 사존께서 숙제를 내신 거야?”
그녀의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질문했으면 사존께서 숙제를 내셨을까 하는 마음 반, 그래도 같은 사존을 모시는 처지로 낙빙하를 이해하는 마음 반으로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길게 침음성을 흘리던 그녀는 검지를 척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낙. 이럴 땐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어떤 걸?”
“사존께서 기운이 없으실 때는 사존께서 좋아하실만한 걸 하면 되잖아?”
“이미 했어. 했는데 그러시는 걸 어떡해?”
“…아낙, 사존께서 문(文)에 뛰어난 청정봉주신 건 맞지만 사존께서도 좋아하는 게 따로 있지 않을까.”
게다가 아낙이 한 건 주로 공부와 관련된 것들이잖아. 사존께서 좋아하는 것이라기보단 아낙이 하고 싶은 것들이지!
참으로 명쾌한 답이었다.
그 말에 낙빙하는 입을 꾹 다물고 시무룩해졌다. 무척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사존은 날 보면 좋아했는데’를 시작으로 항변하고 싶은 말이 주야장천 똬리를 틀고 늘어났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뱉기엔 좀 부끄러웠다.
아낙은 아직 어리다며 그의 사저가 비웃을 것은 둘째치고,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말 중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게 낙빙하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그는 사존에 대해 알았지만,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되짚어준 녕영영은 드물게 믿음직스러웠다. 역시 그래서 그녀가 조력자로 뽑힌 걸까? 그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제 속내를 내보였다.
“그러면 어쩌면 좋아? 내가 아는 건 이것밖에 없어. 사존이 행복하게 날 보고 웃으셨던 건, 이런 걸 했을 때밖에 없단 말이야. 난 이런 것들밖에 알지 못해.”
살얼음이 낀 강에서 발견된 아이가 얼어 죽지 않고 살아있던 건 천운이었지만 그 이후부턴 악착같이 살고자 했던 낙빙하의 의지였다. 사존을 만나기 전 그를 거둬준 양어머니를 만났을 때야 아이 같아졌지만, 행복한 시절은 언제 왔냐는 듯 손으로 잡기도 전에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기본적으로 아이임에도 어른처럼 강해야 했고, 늘 타인을 책임져야 했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도 벅찬데 누군가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을 살았다. 어리광을 부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하고 싶은 걸 전부 하기엔 금전이 없었다. 세상은 그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이기보다 영민함과 눈치를 요구했고 어른스러움을 바랐다. 그래야 그를 책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운 것은 그가 사랑받기 위해 타인에게 해오던 것들. 이것이 낙빙하가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사랑법. 심청추가 그를 어린아이처럼 대한다 해도 이것만은 그도 고칠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다.
낙빙하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히는 아녀도 대략 들은 적이 있던 녕영영이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꼭 아낙이 잘하는 걸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색다른 게 필요할지 몰라.”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들어봐. 우리 청정봉이 최근 들어 다른 봉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는 걸 아낙도 알고 있지? 백전봉에서 아낙을 무척이나 미워하는 건 말도 안되지만……. 여하간 중요한 건 이게 아냐. 그전까지 우리가 다른 봉의 문하생들을 만날 수 있던 건 특별한 날밖에 없었어. 예를 들어 창궁산에서 명절이라 할 날은 청명절과 중원절, 중양절이 대표적인데 이때 정한봉에서 제사를 준비하지. 우리는 다 같이 궁정봉에 모였다가 정한봉으로 떠났잖아.”
“그건 나도 알아. 곧 중추절이잖아.”
“그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렇듯 우리 창궁산도 중요한 날이 있어. 사존에게 감사함을 기리는 교사절이라거나. 이런 특별한 날 사존에게 마음을 담은 걸 드릴 겸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때?”
“음.”
여기까지 듣자 갈피가 잡힐 듯 말 듯 알쏭달쏭했다. 다만 위의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는데, 작년 교사절에 대사형 명범과 자신, 그리고 청정봉의 다른 문하생들 전체가 사존께 어떤 선물이 제일 좋은지 크게 싸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사존께서 앞으로 교사절을 챙기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그러나 녕영영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무엇이라도 그 의미가 있는 날이 좋다. 교사절을 챙기지 않고 평범한 날일지라도 그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전한다면 어떤 방식을 취하는 게 좋을까.
눈을 찌푸리며 ‘특별한 날…….’하고 중얼거리던 낙빙하의 시선이 문득 제가 아까까지 읽었던 책들의 제목에 멈췄다. 자리에서 멈춘 채 한참을 굳어있던 그가 이윽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길을 잃은 듯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가 찾은 답은 그 순간 어째서 녕영영이 시스템이 말한 ‘조력자’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낙빙하가 말을 잇다 멈추자 그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낙빙하를 쳐다봤다.
“아낙, 왜 그래?”
“사저.”
“응?”
지금부터 그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딱 이 시기가 지나면 더는 볼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그가 준비한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 있으니, 더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둬야 한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녕영영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고운 미소를 지은 낙빙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시 나 좀 더 도와줄 수 있어?”
***
요즘 심청추는 우울했다.
그는 이 세계를 좋아한다. 심청추 이전 심원의 삶을 살았을 때부터 <광오선마도> 소설을 보던 독자들 사이에서 ‘절세오이’란 아이디는 유명했다. 참 독자로 이름을 날리던 심원이 처음 이 세계로 와서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즐거움, 저 두가지였다.
소설 속 줄거리에 따르면 심원이 있는 몸의 주인 청정봉주 ‘심청추’는 그가 괴롭힌 주인공 낙빙하에 의해 인곤 모습으로 갖고 놀아지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절세오이로 있을 적 누구보다도 거세하라느니 빨리 죽으라느니 심청추를 욕했던 심원이라도 막상 제가 그런 극악무도한 악역이 되어보니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류청가를 살린 건 단순히 류청가가 뭇 남성들의 지지를 얻는 인기 1위의 캐릭터여서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도 없진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살고자 하는 욕망 탓이었다. 심청추의 인생이 나락으로 치닫는 건 폐관수련 중인 류청가가 주화입마에 걸렸고, 심청추가 그의 죽음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그는 류청가의 생존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주인공인 낙빙하의 변화만으로 확신하기 힘드냐 하면 그랬다.
2년간 심청추는 낙빙하를 보았다. 그가 순하고 착한 아이라는 걸 알았지만 문제는 다름 아닌 ‘무간심연’ 이벤트다. 그는 원작에서 낙빙하가 흑화하는 원인인 ‘무간심연’ 스토리를 전개상 피할 수가 없다.
그야 낙빙하란 먼치킨 남주에게 무간심연 에피소드는 <광오선마도>에서 중요한 두 번째 분기점이다. 첫 번째가 사화령을 필두로 한 마족들이 궁정봉을 점거함으로 악역인 심청추와 반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낙빙하를 보여주기 위해 나서야 하는 이벤트. 이때 심청추는 악인의 행보를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낙빙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이벤트로 오히려 진정한 사제관계를 맞았다.
하지만 두 번째인 무간심연에선 통하지 않는다. 저걸 막는다면 심청추는 사이다 1만 포인트를 잃는다. 사이다 포인트는 쿨 포인트와는 약간 달랐다. 쿨 포인트가 히든 스토리를 찾아내 보완하거나, 줄거리를 비틀어 악역과 조연의 아이큐를 높이고 주인공의 사이다를 보장하거나 지뢰를 피하는 거라면 사이다 포인트는 굉장히 뜬금없는 부분에서 올랐다.
혹시나 만 포인트 이상을 모은다면? 이런 기대가 없지 않았다. 딱 <광오선마도> 세계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하게 된 생각인데, 무간심연까지는 앞으로 3년이 남아있으니 그때까지 사이다 포인트에서 1만 포인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1만 포인트를 얻는다면 자신도 살고 낙빙하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가 훗날 천마와 인간의 혼혈인 게 밝혀지더라도 지금처럼 행복한 아이처럼 살아갈 가능성을 자신이 만들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2년간 노력했지만 아직 만 포인트는커녕 그 절반도 못 되는 수준이었다. 만 포인트가 사라지면 본래 세계로 송환된다 했는데, 이미 심원은 이전 세계에서 식중독으로 죽은 바가 있다. 죽은 몸에 영혼이 돌아가봤자 무얼 더 할까? 그게 결국 두 번 죽는다는 소리지.
이제 무간심연까진 1년밖에 남지 않았다.
심청추가 제일 걱정하는 건 낙빙하가 이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죄책감. 괜한 걸 벌써부터 걱정한다고, 아직 몇 년이나 남은 일인데 지나친 마음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갓 들어왔을 땐 ‘심청추’라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처럼 보이기 위해 심청추 본인도 개인적으로 수련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하면 이야기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고 희망에 찼을 때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렀다.
1년 후에 낙빙하는 무간심연에 들어간다, 그것도 믿었던 스승의 손에.
아무렇지 않았던 때는 언제고 슬슬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상기할수록 심청추는 낙빙하를 볼 때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낙빙하가 그를 더욱 따르게 될 때마다 불씨가 커지면 커졌지 사그라들진 않았다.
낙빙하는 과거 자신이 한 말을 지키듯 심청추만을 따랐다. 그를 진리처럼 받들고 심청추의 말에 토를 달지 않으며 그가 잘못 판단했을 거란 마음은 꿈에도 생각하질 않았다. 타인의 맹목적인 감정을 처음 받아본 심청추가 궁금해져 도리어 “궁금하지 않느냐.” 하고 질문하면, “사존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지요. 제자는 사존을 믿습니다.”하고 낙빙하는 눈을 휘며 웃었다.
낙빙하의 일방적인 따름으로 그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좁혀졌다. 바로 두 해 전 어느 기점까지 그들이 사이 나쁜 사제였다는 걸 기억하는 이들을 찾는 게 이제 더 힘들 지경이었다. 어느덧 과거 심청추의 그런 행동마저 낙빙하의 빠른 성장세에 혹여나 그가 자만하게 될까 일부러 못되게 군게 아니냔 의견이 청정봉에서마저 나오기 시작했으니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까.
독자였을 시절 ‘낙빙하’는 심청추의 최애였다.
최애의 행복을 바라는 건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가 낙빙하의 삶을 망가뜨리는 원흉이나 다름없는 심청추에 빙의된 건 필연일까? 운명의 장난이겠지만 행복을 바라는 대상을 제 손으로 지옥으로 떠밀어야 한다면, 이런 상황임에도 상대의 행복을 바라도 되는 걸까?
기만이야.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심청추는 처음과 다르게 점차 독자적인 ‘심청추’라는 캐릭터를 구축해 개연성 충족 요건이 완화되어 무의식으로 낙빙하를 예뻐하고 있었다. 자신의 최애가 미래에 그를 미워하고 증오해 죽이게 된다 해도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그가 낙빙하를 볼 때마다 가끔 가슴에 통증이 인 듯 따끔거린다 해도 좁은 청정봉에서 낙빙하를 피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낙빙하는 심청추가 조금이라도 멀어질라치면 자신이 잘못한 게 있냐며 슬퍼했다. 현재 그는 애정을 갈구하는 작은 아이일 뿐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다른 문하생에 비해 몸도 작고 성장도 더딘, 가여운 아이.
그리고 이건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한단 사상을 지닌 심청추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낙빙하가 무간심연에 떨어질 거라면, 그전까지 좋은 기억을 만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후일에, 어쩌면… 그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낙빙하에게 잘 대해주던 태도를 버리고 차갑게 돌아선다면 돌아설 수 있었다. 그게 낙빙하에게도 나을지 모른다. 이왕 무간심연 이벤트가 일어나야 한다면 그편이 낙빙하가 덜 상처를 받지 않을까. 정말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에 대한 대비책 하나둘 생각도 못 할 건 없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낙빙하는 어리다. 그가 낙빙하를 냉대하면 다시 낙빙하는 첫만남 때 그가 낙빙하를 알아볼 수 없던 때처럼 살아있지만 존재가 지워진 채로 지옥 속에서 살게 될 거다.
이곳에 있는 한 낙빙하는 외톨이다.
심청추는 그런 낙빙하의 사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바꿔도 되지 않을까. 큰 줄기를 바꿀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줄기만이라도.
녕영영이 낙빙하를 두둔하지만 이게 오히려 청정봉의 다른 문하생들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많은 걸 바꿨다 해도 언제 다시 원작 흐름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변하지 않는 눈으로, 낙빙하는 당신을 믿는단 눈으로 오롯이 심청추만을 담는다. 심청추가 손을 뻗는다. 제게 뻗어지는 손에 놀랐던 아이는 이윽고 그 손이 제 정수리에 얹어지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자 몸을 맡기듯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는, 심원은 심청추로 낙빙하를 곁에 두기로 했다.
아이가 좀 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도록 하고, 아이다운 면모를 보이도록 하며 청정봉 내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최대한 제지했다. 온몸으로 경계를 하듯 신경을 곤두세우던 낙빙하는 어느덧 편안한 웃음을 짓는 일이 많아졌다.
사존, 사존.
아이가 심청추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낙빙하의 그림은 그와 다르게 유연하고 기세가 뚜렷했다. 처음치고 잘해 심청추는 앞에선 낙빙하를 크게 칭찬했고, 서랍에 넣어 남몰래 보관하기로 했다. 후일 낙빙하에게 걸리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라는 생각이었다.
또 어느 날은 심청추 몰래 그의 글씨를 따라 하다가 붓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 망했다고 한다. 하필 그걸 명범에게 들켜 심청추의 앞으로 끌려왔다. “너 같은 게 사존을 따라 해! 이 글씨를 봐. 사존을 뵐 낯은 있는 거야?!”하고 길길이 날뛰는 명범을 진정시키고, 연습하면 나아지겠지만 도대체 얼마나 망했기에 이런 반응인지 궁금해져 한번 보여달라 말했지. 그랬더니 낙빙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 절 쳐다보지도 못하고 울 것처럼 바닥만 보았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잘못된 수련법에서 제대로 된 교법이 적힌 책을 알려주자 어딘가 어설퍼 보였던 낙빙하의 자세는 점차 그 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낙빙하를 보며 심청추도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아이가 대견스러웠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기에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낙빙하가 심청추를 편히 대하듯 심청추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서 낙빙하는 심청추의 활력소였다. 그와 있으며 심청추는 좀 더 원작 ‘심청추’를 아는 이들처럼 있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가 과거의 심청추를 기억하지만 그 속에서 현재의 심청추를 누구보다도 지금이 좋다고 확실하게 긍정해주는 이는 낙빙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불안은 평소엔 잊고 있다가 가끔씩 떠오르는 작은 걱정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우울함에 계기가 있었을 뿐이다.
심청추가 우울해진 이유는 그가 몇 주 전에 꾼 꿈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심원이었을 시절 그의 가족들과 함께했던 일상이 꿈으로 등장했다. 이 꿈을 꾼 날 심청추는 적잖이 동요했다. 그는 이 세계로 와서 지난 생의 가족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 한 치 앞 미래와 생사가 어찌 될지 몰라 불안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였다. 누구나 심청추의 입장이 된다면 그를 이해할 거다.
그러나 정말로, 이걸로 끝인가?
어쩌면 심원은 그의 형이나 여동생, 부모님이 제 죽음을 얼마나 슬퍼할지를 알아 무의식으로 회피했을지도 모른다. 한번 떠올리면 애잔하고 한없이 슬프기만 하니까.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낙빙하가 어리광을 부릴 이를 전부 잃고 이곳에 온 것처럼 심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세계에 오게 됨으로 더는 어리광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던 사람들은 다 지난 세계에 있다.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동생도 전부 이전 세상에 두고 왔다.
그의 죽음은 어처구니없는 사유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재앙이었다. 엎지른 물을 어떻게 없던 것으로 만들까. 그들이 심원을 잃은 것처럼 심원도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
이를 깨닫고 나서 며칠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꿈에 또 그들이 나올까 봐서였다. 이번에 나오면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심원’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보고 싶다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울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날 키워줘서 감사했다고?
그 망설임은 심청추의 안에서 근심이 되었다. 자꾸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꿈에 나타났다. 어떤 날은 초등학생이 되어 과거의 친구들과 뛰놀았고, 어떤 날은 그가 대학생 때의 꿈을 꾸기도 했다. 처음으로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고,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거나 달리기에서 늦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라며 내기도 했지.
이어지는 꿈들은 심원이 <광오선마도>의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두고 온 가족과 형제들,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니 괜찮다고 생각한 것도 한때에 불과했다. 그는 점점 외로워졌다.
알고 있다. 심청추가 된 건 심원에게 기회였다. 내세라거나, 다음 생이란 게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없다면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지금은 따지자면 나름 크나큰 행운이 발휘된 셈이다. 아예 모르는 내용도 아니고 그가 좋아하는 소설 속의 내용이니 말이다. 해야 할 게 있다면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소설의 끝까지 ‘살아남는’ 거다.
그렇지만 그 끝에 당도한다면 심청추는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당장 낙빙하를 무간심연에 보내는 스토리 전개조차 피할 수 없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당장 자신이 잘하는 게 맞는지 누군가에게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다. 그런 위로뿐일 말이라도 들어야 숨통이 틀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유 하나를 말한다면 열을 다 설명해야 한다. 이는 결국 그가 원작의 심청추가 아님을 밝히는 꼴이었다.
설령 그게 그가 아끼는 낙빙하와 그에게 목숨 빚이 생긴 류청가라 하더라도 이 비밀은 지켜져야 했다. 말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힘으로 바꿨던 것들까지 전부 잃을지도 몰랐다. 그게 그가 갈수록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된 이유였다.
홀로 대나무 숲을 쭉 산책하며 심청추는 부채를 살랑거렸다. 오늘따라 볕이 좋았다. 평소에도 자주 밖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오늘같이 날이 좋은 적은 몇 없었다. 지나치게 햇볕이 따갑지도 않고 하늘은 화창하다. 여기에 선선한 바람까지 부니, 방에만 앉아 시를 읽으며 공부하기보단 야외수업을 하기 적합한 날씨라 할까.
이따 명범에게 일러 아이들을 바깥에 모이게 해야겠다 다짐하고 부채를 탁하고 접는다. 아마 녕영영은 환호할 거고 드문 야외수업이라 다른 아이들도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 명범도 대사형으로 모범을 보이려는 듯했지만, 나이로 따지면 아이인 건 마찬가지라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날 터다.
낙빙하는…….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고 보면 그는 요 며칠 낙빙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음의 심란함이 한층 커졌을 때, 낙빙하가 그에게 와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대답을 하나씩 해주다가도 얘기를 듣다 보니 그가 하는 질문이 전부 책에 적혀있던 게 떠올랐지. 평소 같았다면 그는 책을 찾아보면 된다는 말이 아닌 그가 직접 하나씩 답을 해주는 쪽을 택했을 거다.
떠올리면 그날 이후로 낙빙하의 얼굴을 마주치는 게 현저히 줄었다. 아침 조반상을 갖다 주는 거나 수업을 빠지지 않는 건 똑같았지만 그 밖에 나머지 질문을 하거나 그를 졸졸 따라다니진 않았다.
아무래도 근래 그가 혼자 있고 싶다며 동행을 거절해서 그런 모양이다. 자신은 잘 있는 아이를 지금 눈치보게 만든 건가? 갑자기 몰려드는 자괴감에 심청추는 두어 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낙빙하를 만나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좀 더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마음을 다잡자, 심청추. 이제 넌 여기에 있잖아. 언제까지 옛사람들이 나온 꿈에 휘둘릴 생각이야.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셈이야. 오히려 그 사람들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자신을 보고 싶은 건 맞겠지만, 그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단 걸 알면 응원하고 싶겠지.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슬퍼하기엔 한없이 늦었는데 인제 와서 과거에 휘둘리다니 바보같다. 특히 그의 부모님은 그가 책임지게 된 청정봉과 여기 아이들을 한명 한명 본다면 심청추를 혼내고 ‘여기서 네가 어른인데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을 셈이냐.’라며 꾸짖을 사람들이었다.
그만하자. 그만 생각하자. 어른스럽게 굴자. 지금 난 여기 있으니 현실에 집중하자. 몇 번을 되뇌며 눈과 코, 입을 큰 손으로 가리고 중얼거리던 그는 이윽고 두 손을 얼굴에서 떼냈다. 처음 산책을 나설 때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좋아. 돌아갈까.”
심청추가 그리 중얼거린 찰나였다. 갑자기 여기서 들릴 리 없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청추.”
어?
익숙한 목소리에 설마설마 하던 그가 뒤를 돌자, 당장이라도 백전봉에서 자신의 문하생들을 연무장에서 선두지휘하고 있을 류청가가 여깄었다. 류사제가 여기 오다니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냐고 코치코치 캐묻고 싶었지만 심청추란 인물은 그런 철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닫았던 부채를 촤르륵 펼쳐 입을 가린 심청추가 류청가에게 질문했다.
“류사제, 기별도 없이 여긴 무슨 일이야?”
그러나 류청가는 심청추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심청추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말이야…….”
“응?”
“아니다. 돌아가겠어. 쓸모없이 시간만 소비했군.”
뭐지? 뭔데?
이쯤 되자 진짜로 뭐가 뭔지 모르겠는 심청추야 말로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심청추를 보는 것, 용건은 그게 끝이었는지 정말로 뒤돌아 심청추에게서 멀어지는 류청가의 등을 어이없이 보다가 심청추가 소리를 크게 질렀다.
“류사제! 하고 싶은 말 있어서 여기에 온 거 아냐?? 말해도 돼!”
그러자 류청가의 발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뒤도는 법 없이 아직도 무슨 연유인지 혼자 모르고 바보같이 서 있는 심청추에게 딱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 듯 백전봉으로 떠났다.
“네 제자들 간수나 해.”
***
이상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전봉에서 난데없이 류청가가 찾아온 게 오늘 하루 중 최고로 기묘한 일이리라 어림짐작했으나 현실은 그보다 더했다. 갑자기 궁정봉에서 악청원이 그에게 오랜만이라며 서찰을 보내오기도 했고, 선주봉에서 뜬금없이 심청추가 주문한 적도 없는 옷을 선물이라며 보내오기도 했다. 취선봉에선 이번에 새로 빚은 술이라며 술 단지를 보내줬고, 목청방은 해독불가 병으로 고생하는 심청추에게 기존의 약에서 좀 더 보완할 약재들을 같이 동봉한다며 서신과 함께 다양한 약재를 청정봉으로 보냈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오늘따라 그를 찾는 연락이 사방 군데에서 온다며 웃고 넘겼겠지만 이런 기이한 일이 청정봉에서도 일어났다는 거다.
“사존, 여기 사존이 생각나서 꽃으로 예쁜 화관을 만들었어요. 선물로 드릴게요!”
평소에도 그에게 이것저것 주긴 했지만 유난히 수줍은 얼굴로 눈을 반짝 빛내며 말하는 녕영영과,
“사존! 집안 어른들이 사존께 항상 감사하다며 보내주신 차(茶)입니다. 이번엔 지난번과 다르게 좀 더 향긋한 꽃 향이 날 거라 전해달라 하셨어요.”
쭈뼛거리며 그에게 종이로 감싸져 그 위로 새끼줄이 묶인 차 꾸러미 하나를 넘긴 명범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그에게 뭔가를 건네주지 않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청정봉 내에서도 낙빙하가 지나치게 두각을 보여서 그렇지 본래 각 금기서화에 능한 제자들이 있다. 거문고에 능한 제자가 있고 바둑 실력이 으뜸인 제자가 있었으며, 심청추 다음으로 서예에 능한 이가 있고 또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는 이가 있었다.
이들 제자 하나하나가 전부 청정봉주 심청추를 찾아와 그에게 선물을 건네니 오늘따라 창궁 십이 봉우리 중 가장 짙게 녹음이 우거진 청정봉이라 할지라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둔한 심청추라도 그쯤 되자 누군가 작당했단 걸 알아챘지만 그 당사자가 심청추를 찾아오지 않는 데다 코빼기 보이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빙형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가 그동안 빙형을 상대해주지 않아서 이런 거야? 나도 이유가 있었어. 일단 나타나 봐.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는 침실의 책상 위에 체통도 버린 채 엎드려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의 주변에 오늘 내내 다른 봉주들을 필두로 제자들이 건네온 선물들이 수북했다. 대충 정리하기엔 그 양이 너무 많은 데다 특히 다른 봉주들에게 받은 것 중 일부는 서신의 답장과 함께 답례품까지 생각해야 해 죽을 맛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낙빙하는 저녁이 되도록 그의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낙빙하가 그의 식사를 챙기지 않은 것도 이번이 난생처음이었다. 어차피 벽곡수련을 한 이로 굳이 밥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낙빙하의 음식에 길든 심청추로선 이 상황이 생소했다. 당장이라도 낙빙하가 나타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일 것 같은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다니.
설마 빙형, 아예 청정봉을 하산한 건 아니지?
이상한 사태의 주범이 낙빙하임을 짐작하고 있던 심청추가 걱정되는 마음에 녕영영을 붙잡고 묻기도 했으나 녕영영은 어딘가 의뭉스러운 웃음만을 보였다.
“걱정마세요! 아낙은 어딜 멀리 떠난 게 아니에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태연한 반응이 미심쩍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하고 기다리고는 있지만……. 슬슬 심청추는 낙빙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닐까 불안했다. 밤은 깊어져 가는데 벌써 몇 시진 동안 낙빙하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정말 안 오면 일어나야지.
“어? 사존. 여기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렇게 낙빙하를 걱정하며 그가 기다리지 않은 척 책을 펼친 채 한 장도 뒤로 넘기지 못하고 직접 찾으러 가야겠다- 하고 마음을 품었을 때가 돼서야 그가 기다리던 이가 등장했다. 청정봉의 문하생임을 뜻하는 흰 도복은 뭘 하고 온 건지 흙투성이에 얼룩이 져 있고 알게 모르게 이상한 냄새가 나는 데다 그 본인의 머리엔 미처 떼지 못한 나뭇잎도 붙어있었다.
도대체 뭘 하다 이리 늦게 온 거냐고 꾸중할 참이었던 심청추는 엉망인 낙빙하의 꼴을 보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했던 건가? 아니다. 녕영영이 낙빙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녀가 이 꼴을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럼 낙빙하는 왜 이런 꼴로 여기에 온 거야? 아냐. 누가 그를 이리 만들었는지는 둘째치고 낙빙하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낙빙하. 도대체 오늘 저녁 어디에 갔다가 이제 온 것이냐? 이 모습은 또 뭐란 말이냐?”
“사존.”
기겁하고 낙빙하를 다그치면 아이가 놀란 표정을 했다가 그의 말에 이제야 제 상태를 깨달았는지 두 손을 펼쳐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아.”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제 옷차림새를 이리저리 점검하던 그는 멋쩍은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자가 겉모습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심청추는 아직도 여물지 않고 어리숙한 면모를 보이는 낙빙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소리를 했더니만 그가 무사하단 걸 알자 그런 마음도 싹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낙빙하가 씻고 나서 들어도 괜찮다. 무사하면 됐지.
그는 낙빙하에게 씻고 여기로 다시 오라 말할 셈이었다. 아이가 한 마디를 더 올리지 않는다면, 저 말을 확실하게 입 밖으로 내뱉었을 게 분명했다.
“사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일을 처리하던 게 오히려 못난 꼴을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사존, 사존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지금부터 제자가 사존을 모시고 싶습니다.”
해시가 되기 전까지 딱 반 시진을 남겨둔 시각이었다. 이런 늦은 밤에 이 아이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혹시 낙빙하가 이런 몰골인 것과 연관되어있나? 아까부터 계속된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이고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심청추가 간신히 입을 뗐다.
“하나만 묻겠다, 낙빙하.”
“네, 사존.”
낙빙하는 공손하게 예를 취하고 있지만 심청추를 바라보는 그 눈빛만은 하늘의 별처럼 선명한 빛이 깃들어있었다. 아이는 미소지으며 이어 말했다. 제자, 듣고 있습니다.
“넌 오늘 내내 다른 봉부터 시작해서 네 사형과 사매에게 무얼 말했기에 이런 선물들이 온 거지?”
“그건…….”
침을 꿀꺽 삼킨 낙빙하가 대답을 망설였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을 달싹거렸다가 입을 다문 그는 심청추가 바란 답 대신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사존. 사존께선 제자를 믿으십니까?”
그가 뭐라 할지 내심 궁금했던 심청추는 낙빙하의 답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이의 질문은 어쩌면 심청추의 고민과도 맞닿은 측면이 있었다.
눈앞의 이 작은 아이가 커서 그가 보았던 소설 속 인물이 되어 그를 죽인다.
본래라면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는 게 맞을지 몰랐다. 원작의 심청추는 낙빙하를 싫어했다. 그 빛나는 재능과 그가 가진 어머니란 존재를 질투했다. 자신과 다르게 제 때 수련을 받을 기회를 가진 낙빙하를 미워했다.
낙빙하는 원작 심청추가 가지지 못한 걸 전부 가진 존재였다.
심원은 아니었다. 그는 이야기를 바꾸고 싶어하는 이방인이며 따지자면 이 창궁산에서 누군가의 죽음과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 죽어 빙의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있는 이들도 두 번째 기회가 생길까?
벽곡수련을 한 신선은 긴 수명을 갖고 젊은 모습을 유지하며 살 수 있지만 대신 다음 생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환생할 수 없는 존재다. 심청추가 <광오선마도>를 보면서 악청원과 류청가의 죽음에 마음 아파했던 건 그들이 죽어 단순히 창궁산의 명예가 바닥에 처박혔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에게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저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는 한가지 바람을 품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람 좋은 악청원도, 의학에만 매진하느라 바쁜 목청방도. 한 성격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제청처도, 빚을 갚아야 한단 이유로 그를 도와주는 류청가도. 이 세계의 여타 다른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가능성 속에서 될 수 있도록 살아있기를.
낙빙하를 믿는다는 게, 어쩌면 바보 같은 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심청추는 원작의 심청추가 아녔다. 시스템의 OOC 강제력에게서도 그렇고 그는 이미 ‘다른’ 심청추가 되었다.
게다가 그도 듣고 싶은 답이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는 이 아이를 외로운 지옥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이 행복을 누구보다도 응당 누리게 하고 싶었던 주제에 빼앗아야 한다. 낙빙하는 이 미래를 알게 되면 심청추를 믿을까. 믿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답은 그가 듣고 싶으면서도, 반대로 하고 싶은 답이다.
“그래.”
너를 믿는다.
심청추의 대답에 크게 눈을 뜨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있던 낙빙하의 머리 위로 항상 그러했듯 심청추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음색과 행동으로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한쪽 무릎을 굽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 사존은 오늘 네게 질문할 게 많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늘 네가 보여줄 것을 본 다음에 해야겠구나.”
아이는 조심스럽게 제 머리 위에 얹어진 사존의 손 위로 그보다 작은 자신의 손을 덮었다. 그러자 낙빙하의 팔과 심청추의 손으로 인해 낙빙하의 얼굴이 3분의 2정도 가려졌다. 아이는 사존의 손목을 잡고 그 손바닥에 제 얼굴을 부볐다. 뒤늦게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란 걸 기억해낸 낙빙하가 움찔하고 심청추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금방 심청추에 의해 제지됐다.
그는 두 팔로 낙빙하를 품에 가둔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많이 자랐지만 아직은 심청추보다 작았다. 그렇지만 슬슬 업기엔 버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서 더 큰다면 이제 아이처럼 대하긴 힘들겠다고 왠지 모르게 아쉬워진 심청추가 아이를 안은 자세를 고쳐안았다. 그는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한 팔과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쳤다. 갑자기 사존의 품에 안기게 된 낙빙하가 높아진 시야에 놀라 딸꾹질을 했다.
자신이 더럽고 무겁다며, 감히 사존께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내려달라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지만 심청추는 그런 주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제 눈도 못 마주치는 낙빙하를 보고 가슴께에 그동안 무겁게 달랑거리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낙빙하가 부끄러워할수록 심청추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귀엽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심청추가 퍽 낮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이 사존을 두고 몰래 어딜 다녀온 벌이다. 빙하야, 길 안내는 하지 않을 모양이냐.”
오늘 제가 사존의 저녁 식사를 빼먹은 것도, 사존께 너무 늦게 얼굴을 비춘 것도 사실이라 낙빙하는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쪽이라며 손짓했다.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라 그런지 낮엔 적당히 서늘했던 날씨는 밤이 되자 공기가 찼다. 그는 선인의 몸이라 상관없지만 낙빙하는 아니었다. 혹여나 낙빙하가 감기에 걸릴까, 겉옷을 벗어 아이의 몸 위로 꼼꼼히 걸쳐준 그는 다시 아이를 품에 안고는 낙빙하가 일러준 방향대로 따라 걸었다.
슬슬 중추절이 다가와 하늘에 뜬 달이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둥그스름한 보름달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환한 빛을 내는 달만이 둘을 지켜보는데, 심청추는 길을 걸으며 어째서 낙빙하의 옷이 그토록 성한 구석이 없는지를 몸소 깨닫고 있었다.
청정봉은 산 봉우리 높은 곳에 있는 곳이다. 심청추가 청정봉주가 되기까지 무수한 세월이 지나 이제 사람이 다니는 길은 어느 정도 돌들이 치워져 그냥 걷기에도 무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의 이야기지 반대로 그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사람이 걷기 힘들 정도로 험난했다.
낙빙하가 안내하는 곳은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엔 들짐승도 없어 걷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건 어른의 기준이지 아이에겐 여전히 힘든 길이 맞았다. 발바닥 아래로 돌들이 밟히고 심청추조차 가끔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로 가파른 이 길을 낙빙하가 도대체 어떻게 찾아 걸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진작 낙빙하를 품에 안길 잘했다 생각했다. 어째서 아이가 자신을 깊은 곳으로 이끄는지는 모르지만 심청추는 낙빙하를 믿겠다 했다. 그렇다면 믿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게다가 아직 무간심연처럼 큰 이벤트가 오기엔 시간이 남아있고 시스템도 별다른 말이 없는 거로 보아 괜찮겠지.
“앗, 사존… 이제 내려주셔도 괜찮습니다.”
다 왔어요. 여기입니다.
아이는 붙잡았던 심청추의 옷깃을 놓고 내려달라며 심청추를 쳐다보았다. 낙빙하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아이는 앞으로 걷기 전 머뭇거리며 심청추를 올려보았다.
“저, 사존…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말할 셈일까. 갈수록 알쏭달쏭해지는 낙빙하의 행동에 심청추는 궁금증이 자라났다. 혹시 눈앞에 있는 빙형이 내가 아는 낙빙하가 아니라 빙형의 요괴나 괴물인 건 아니겠지? 그러나 아이가 낙빙하 본인임을 누구보다도 그를 안고 여기까지 온 심청추가 잘 알았다. 그는 울망울망 저를 올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를 응시하다 부채를 펼쳤다.
“무엇이더냐?”
“제자는, 사실… 사존께서 요즘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어떻게서든 사존에게 힘이 되고 싶어, 노력한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멋대로 짐작한 걸지도 모르지만, 만약 틀렸다면 제자 낙빙하. 사존께서 주시는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사숙들과 사형, 녕사저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탓이니 분부한 대로 돌아간다면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심청추는 제가 방금 무얼 들은 건지. 두 귀로 들은 말을 의심할 정도로 매우 놀랐다. 아이가 자신의 기분을 눈치챘을 거란 예상은 했다. 낙빙하는 눈치가 빨랐으니까. 심청추가 사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아이가 제 기분에 맞추느라 제대로 요 며칠 얼굴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게 다 제가 기운을 차렸으면 하고 일을 벌인걸 줄은 몰랐다. 다른 이들이 저를 내내 찾았던 것과 낙빙하가 온종일 보이지 않았던 이유. 류청가가 제자들 간수를 하라고 말한 거나 녕영영이 낙빙하는 무사하다고. 사존에게 돌아올 거라고 장담한 건 이런 의미였을까.
지금 보니 다른 봉주들에게 연락이 전부 간 건 낙빙하 혼자만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류청가가 말했지 않았나. ‘제자들’이라고. 이 아이는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다른 사형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한 거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에게까지 가서.
그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채로 잠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이는 그런 심청추를 빤히 응시하다가 웃었다. 낙빙하에게 그는,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이력이 있던 사존일 터였다. 그런데 그가 기운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혼자서는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이 일을 얼마나 오래전부터 계획했을까.
심청추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도저히 알기 어려워졌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나오는 목소리는 그의 의지와 다르게 잠겨있었다.
“…그래.”
이 대답 하나에 낙빙하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심청추를 두고 저만치 앞으로 나아갔다. 멍하니 저를 두고 앞을 걸어가는 낙빙하의 등만 쳐다보는 심청추를 뒤로 하고 걷던 낙빙하가 그때 갑자기 뒤를 돌았다.
“사존. 이 제자는 사존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움직인다. 낙빙하가 팔로 수풀을 해치자 미세하면서 환한 불빛들이 그 틈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밤, 하늘에 밝은 달이 존재하니 본래 지상엔 그만한 빛을 내는 것이 없어야 맞았다. 지상에마저 저만한 빛을 내는 게 존재한다면 질투를 느낀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어버릴 것이 자명하니까.
여기에 지금, 그의 눈앞에 아주 작은 낙원이 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불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하의 청정봉주가 드디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낙빙하를 이해했다. 이해해버렸다. 그가 왜 오늘 하루 그의 곁에 오랜 시간 떠나있을 수밖에 없던지를 그 머리로 납득해버렸다. 왜 낙빙하가 이런 꼴이었는지, 몸에서 났던 이상한 냄새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옷에 왜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낙빙하를 저렇게 만든 건 심청추 본인이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을 향해 어여쁘게 웃는 낙빙하를 내려보았다.
저 애는 자신을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 세상의 모든 귀한 걸 그에게 보여주고자 이런 풍경을 만들었다.
본래 반딧불이는 여름에만 나타나는 곤충이다. 늦은 9월경까지 있는 때도 있지만, 매미처럼 오래 사는 곤충이 아닌 만큼 한여름이 아닐수록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산에 나타날 때도 있지만 주로 물이 있는 계곡에 주로 서식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이 산에 이토록 많은 반딧불이가 있다면 그건 다 낙빙하가 하나하나 손수 잡아 여기에 풀어뒀단 이야기다.
혹여나 그가 자신이 준비한 선물로 만족하지 못할까봐 낙빙하는 여러 안배를 해놨다. 자신의 사형과 사저의 힘을 빌리고, 심청추를 아끼는 다른 봉주들에게도 부탁했다. 심청추는 낙빙하의 손과 다리 등에 나 있는 생채기를 떠올리고 속이 아파왔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는 반딧불이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사존께서 서고의 책을 읽으라 명령을 내리셨을 때, 거기서 채근담(菜根譚)이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문득 반딧불이와 관련된 구절이 떠올라 사존께 꼭 이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사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낙빙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아이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낙빙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온갖 말들이 목구멍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당장 건네고 싶은 말들이 저들끼리 거세게 부딪혔다가 물살 속에서 가라앉고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난파된 배처럼 고장 난 감정을 건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래서 저 감정들이 건져지기를 기다리기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 감정에 뛰어들기로 했다.
심청추는 기꺼이 낙빙하가 보여준 것에 대한 환희와 고마움, 자랑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을 열 스푼 담아 두 팔에 힘을 줬다.
“…늘 이 사존을 놀라게 하는구나.”
바람을 타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심이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은 낙빙하가 그의 품속에서 안도한 얼굴로 농담조로 말했다.
“사존께서 놀라셔서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셨나요?”
“제자가 준비한 선물을 싫어할 스승이 어디 있겠느냐.”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거냐며 심청추가 서운하단 티를 내자 낙빙하는 믿는다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사존께서 절 믿지 못해 저를 두고 떠나버릴까 봐 저를 안은 사존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안아버렸다.
그 행동이 하나같이 어설픈데 가지 말라고 저를 안는 게 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심청추가 참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절 놀리는 줄은 알았지만서도 순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던 낙빙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괜찮으신 건가요?”
“그래.”
“사존께서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아이는 품 안의 심청추를 천천히 놓고 그를 올려보았다. 사존의 표정은 예전과 같았다.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어떤 근심 걱정 없이 눈앞의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떠오르는 반딧불이의 불빛들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사존보다는 아녔다.
둥그런 이마도 선이 가는 손도 얼굴도, 단정하면서 부드러운 눈빛도. 그는 심청추를 이루는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그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어주는 걸 제일 좋아했다.
“사실 녕 사저에게 특별한 날 사존에게 마음을 전하는 건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특별한 날이라고 해도 마땅한 게 몇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의외로 저는 사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어요.
쓸쓸한 듯한 낙빙하의 목소리에 심청추는 아이를 쳐다봤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쉽사리 내뱉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낙빙하는 그의 뜻을 이해한 듯 보였다.
“괜찮습니다. 사존께 폐를 끼치고 싶던 건 아녔어요. 저는 사존께서 좋아해 주신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하지만 사존, 한가지 제자가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이느냐?”
“만일 사존께 비밀이 있으시다면…, 언젠가 그걸 제게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청추는 어째서 낙빙하가 제게 이런 말을 하는가 되짚었다가 이 모든 일이 자신이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란 걸 떠올렸다. 하지만 숨기지 않는다면 어디까지 숨기지 않아야 하고, 그에게 어디까지를 말해야 하는가.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말한다면, 낙빙하는 그를 믿어줄까.
그의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아이는 부드러운 검은색 눈으로 또렷하게 자신을 마주 보았다. 반딧불이의 노란색 빛이 그들의 얼굴 앞에서 날아다녀 그들의 얼굴을 각자 환하게 비췄다가도 금방 어두워지게 만들었다. 망설이는 심청추의 앞에 낙빙하가 손을 내밀었다.
“저를 믿으시나요?”
낙빙하의 물음은 아까와 같았지만 다른 의미를 띄고 있었다.
“저는 사존을 위해 강해질 것입니다. 사존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되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사존께서도 저를 좀 더 의지할 수 있게 되겠죠. …사존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빨리 자라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존.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낙빙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까부터 술렁이는 가슴을 도저히 감출 길이 없었다. 낙빙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그리고 눈앞의 이는 그가 키운 거나 다름없는 하나뿐인 제자. 이 말들이 구애처럼 들렸다면 자신이 이상한 거겠지.
훗날 낙빙하는 많은 여성을 만나고 그들을 거느리게 된다. 혹시 남주인공은 언제라도 사랑의 고백을 내뱉을 수 있게 태어날 때부터 언변을 타고나는 걸까?
숨은 제대로 쉬어지는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싶어지는 걸 억누르며 심청추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조심스레 낙빙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심장에 단단하면서도 곧은 한 쌍의 눈이 날아와 박혔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별 뜻이 있는 말이 아닐텐데도 입안이 버석 말랐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피하면 더 이상해지지 않을까 싶어 큰일이었다. 마음 속으로 그는 벌써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이 상황에서 도망치라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자신이 있을 정도로 난감했다.
저 말은 하나의 의미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믿어달라고 하는 것.
그는 낙빙하를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의 고백 같은 말로 더욱 확신했다.
심청추는 이 세상에 있는 걸 후회하지 않을 거다. 그의 가족들이 자신이 살아있는 걸 알았다면 어디에서든 저에게 행복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말을 건넬 거라 말했지만 그건 약간의 허세였다. 직접 만났을 때 그들이 어떤 말을 할지 심청추는 아직 두려웠다.
멀지 않은 미래 낙빙하가 그를 원망할지 두려웠다. 배신했다며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지 두려웠다. 낙빙하가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게 무서웠다.
이건 다 낙빙하가 그를 믿듯, 그도 낙빙하를 믿기 때문이다. 낙빙하가 그를 좋아하듯, 그도 낙빙하를 아끼기 때문이다. 차라리 믿지 않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면 다가올 이별을 아파하고 죄책감을 가질 일은 없었을 텐데.
한참이나 답을 망설이던 심청추가 먼저 눈을 감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
“네.”
“이 사존이 너를 아프게 한다 해도 기다릴 것이냐?”
낙빙하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긍정했다.
“예.”
“네가 많이 아플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사존께선 저를 아프게 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단호하면서 상냥한 음색에 할 말을 잃었다. 낙빙하가 다시 한 번 그에게로 마치 잡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설령 사존께서 저를 지옥으로 민다 해도 저는 그 고통마저 받아들이겠습니다.”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가 심청추는 고개를 숙였다. 아, 정말. 모르겠다.
심원은 낙빙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진 말이다.
그는, 심청추는 후회하고야 말 거다. 낙빙하의 말과 그 얼굴에 홀렸다고. 저 아이와 보낸 이 시간을 그의 삶 안에서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슬퍼질 수 있겠다고. 그리하여 훗날 그 빈자리를 내내 그리다가 오늘의 이 말을 떠올릴지 모르겠다고.
차라리 믿지 말란 말을 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바라는데 심청추가 어떻게 그러지 말란 말을 하는가. 자신을 믿지 말라고. 많이 좋아하지 말란 말을 어떻게 하는가.
이미 낙빙하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자리 잡았다.
이곳의 무엇도 심청추에게 이토록 강하게 마음을 끌어내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심청추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분명 많이 후회하고 자책하겠지.
‘믿지 않는다.’란 말을 건네기엔 이미 늦었다. 낙빙하가 아니라, 심청추 본인에게 늦었다.
해야 했다면 아주 처음, 그가 이 세계에서 낙빙하 앞에 섰을 때 이전의 원작 심청추가 그러했듯 똑같은 행보를 걸으며 낙빙하를 무시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던 것부터 이미 심청추는 낙빙하란 강물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손을 뻗을까 말까 망설이던 심청추가 먼저 눈을 감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따뜻한 온기가 생동하게 느껴졌다. 이 체온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가 건네지 못할 말을 입안에서 되뇌었다.
나중에도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이 모습의 낙빙하가 맞다면. 오늘과 똑같은 말이 미래에도 도돌이표로 돌아온다면, 그런 순간이 온다면.
빙하야.
바란다면…, 이 사존이 너와 함께 지옥까지 가주마.
어두운 밤하늘, 반딧불이가 여름의 끝을 완전히 알리듯 아름답게 빛난다. 정답도 오답도 없는 길 위에서 두 사람의 손은 여전히 겹쳐져 있었다.
***
[퀘스트 완료!]
[청정봉주 ‘심청추’가 상태 ‘우울함’에서 벗어났습니다.]
[미션 클리어와 히든 보상을 얻으셨습니다. 상태창을 누르시면 히든 보상 내역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보상: 사존 ‘심청추’의 웃음과 칭찬. 그리고…….]
[‘■■’의… @$%!&* 대상과 해당 세계관의 연결 상승… 역할 재인식… 재부팅을 위한 통신시스템 연결 재시도…….]
…….
[재부팅 완료. 보상 확인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청정봉주 수아검 ‘심청추’의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임시 서비스를 이용해주신 귀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