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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계시하 중추지절에 강녕하십니까.

벌써 선생님과 이렇게 서신을 주고받은 지도 어언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주고받은 필담은 제게 좁은 시야를 비춰 주는 암구명촉이자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길잡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해주신 심 선사님의 이야기는! 그 미담을 듣고 제가 밤잠을 설치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편지에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글재주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말이지 선생님처럼 뜻이 맞는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제 꿈을 만드셨으니,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문장을 쓰신다고 하셨지요. 분명 대단한 저술가이심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언제쯤 선생님의 문학을 꼭 읽어볼 날이 올까요? 지금까지 제가 아무리 졸라도 결코 직접 쓴 책을 보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마 제 배움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이제부터는 다릅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청정봉 내문제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보다 오늘 급히 몇 자 적게 된 것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저는 다음 달에 드디어 심 선사님, 아니, 이제는 명실공히 심 사조를 뵙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원래는 약관이 지난 선배들 몇이 일행을 꾸리셨으나, 사존의 은혜로 특별히 저도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정길에 올라서도 틈틈이 기별을 전하겠습니다.

창궁산에서, ○○○ 배상.

 

 

막 불긋해지기 시작한 가을의 화촉을 가라앉히려는 듯 며칠 내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본래 춘풍과 추우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을 빗댄다는데, 얇은 대나무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는 심청추의 모습에서는 만고풍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는 시간의 잔흔 대신 옅은 걱정이 배어났고, 그마저도 기다리는 정인에 대한 애정을 가득 품고 있었다.

심청추와 낙빙하의 풍류는 때를 타고 강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두 사람은 발 닿는 대로 훌쩍 떠났다가 어디든 서로를 지붕 삼고 집 삼아 머물렀다. 지금은 그리운 풍경을 닮아 넓은 대밭이 펼쳐진 어느 향촌에 산을 등지고 소박한 살림을 풀었지만, 또 마음이 내킬 때 변덕을 부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심청추는 늘상 십 리 안팎의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곤 했다. 어려운 부탁마저 성심껏 들어주고 사소한 성의에도 반드시 보답하니 좁은 마을 안에서 심 선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때문인지 맘씨 좋은 선사의 반려로 공공연히 소문이 난 낙빙하의 인기도 못지않았다. 오늘 마을에 내려간 낙빙하가 또 늦는 것을 보니 몇 사람들이 자꾸만 옷깃을 잡으며 이런저런 것들을 안겨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리자 심청추는 고개를 돌렸다. 뿌연 운무 너머에서 낙빙하의 그림자가 고작 반 나절만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나왔다.

“젖지는 않았느냐? 비가 점점 더 많이 오는구나.”

심청추가 낙빙하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며 부드럽게 물었다. 부슬거리던 빗방울은 낙빙하의 머리 위로 드리운 결계에 가로막혀 톡톡 튕겨나가고 있었으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낙빙하는 곧바로 결계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마치 빗속에서 주인을 찾아 달려온 커다란 개처럼 안쓰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춥습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사존과 몸을 녹이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자.”

속이 훤히 보이는 낙빙하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이 즐거워 심청추가 웃어 보였다. 이때다 싶어 낙빙하는 좁은 우산 안쪽으로 거의 구겨넣다시피 몸을 붙여왔다.

“제자가 늦어서 걱정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럼, 염려하다가 이 속이 다 타들어가는 줄 알았다.”

능청스럽게 말을 받던 심청추는 문득 예상과 달리 낙빙하의 품이 비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치 빠른 낙빙하가 얼른 대답했다.

“오다가 누굴 좀 만났습니다.”

심청추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희뿌연 안개 속에서 키가 낙빙하의 허벅지에도 채 못 미치는 아이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결계 안에 서 있는데도 진흙과 빗물로 더러워진 것을 보아하니 쫄딱 비를 맞던 중 낙빙하에게 발견된 모양이었다.

“이 아이는?”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느라 늦은 제자를 생각하니 심청추는 그만 마음이 벅차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낙빙하가 대답하기도 전 별안간 아이가 사시나무 떨듯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물었다.

“저, 혹시 정말로 심……. 심 선사……. 아니 수, 수아검 심청……. 시시심 사조이십니까?!”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아이는 서 있을 기운조차 잃은 것처럼 휘청 하고 쓰러졌다. 심청추가 가까스로 손을 뻗어 아이의 등을 받쳐내자, 아이는 그마저도 소스라치게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이는 뒤집힌 소매도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양손을 모아 제대로 된 인사를 올렸다.

“사, 사조의 생신을 맞이해 사존께서 보내신, 아, 아니. 사존의 명을 받들어! 뭐, 뭐더라……. 아, 단자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시도와 달리 준비해 온 말을 전부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엉망으로 문안을 마치고 경직된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제서야 심청추는 안개 속에서 유달리 희어 보였던 아이의 옷차림에 주목했다.

“녕 봉주가?”

이제는 익숙해진 제자의 새 호칭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렀다. 얼마 전 취임식에서 심청추는 류청가의 옆에 앉아 장난스레 이제는 노老봉주라니 꼬부랑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고, 더 이상의 장부 정리는 없다며 술을 마시고 대 자로 뻗어버린 상청화와 오랜만에 밤새 고향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도 새 주인이 생긴 죽사를 완전히 등질 때에는 제법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그런데 이렇게 녕영영의 제자가 찾아오다니, 심청추는 기분이 몽글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일행도 없이 혼자 보내다니, 아무래도 네 사존은 너를 정말 신임하는 모양이구나.”

여러 가지 생각을 흘려보내던 심청추의 입가에 나긋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놀라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가장 어린 소제자일 뿐이고……. 사형과 사저들은 일이 생겨서 중간에 헤어지느라…….”

“그래, 그래. 몸이 아직 젖었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들어도 된다.”

심청추는 낙빙하 쪽으로 몸을 좀더 붙이고 아이가 우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아이의 머리 위에 낙빙하의 결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우산 밖에 서 있어도 큰 의미는 없었으나,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 걸음도 다가오지 못했다.

아직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어린아이인데, 노봉주를 만났으니 몹시 어려운가 보구나. 내심 안쓰러운 마음에 심청추가 낙빙하에게 우산을 넘겨준 뒤 아이에게 막 손을 내밀려던 그 때였다.

“그런데 정말 심 사조께서는 여섯 살에 남강을 넘어온 마물과 싸워 이기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퍼뜩 고개를 든 소제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심청추는 그만 품위 없게 입을 벌릴 뻔했으나 체면을 생각해서 가까스로 참았다. 소제자의 눈빛은 어쩐지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조금은 부끄럽지만 ‘심청추 열혈 추종자’같은……. 대답할 말을 찾을 시간을 벌기 위해 짐짓 위엄 있게 고개를 돌렸던 심청추는 그대로 낙빙하와 눈을 마주쳤다.

아,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왼쪽에는 제자, 눈앞에는 사손師孫. 어쩐지 이번 생일은 묘하게 순탄치 않을 것 같다.

대답 대신 심청추는 근엄하게 소맷자락을 펄럭이고, 낙빙하에게 어서 갈아입을 옷과 손님 방을 내주라고 명했다.

심청추가 직접 간단한 다과를 챙겨 주자 소제자는 거의 몸둘 바를 몰랐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일행은 마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마을을 만나 발이 묶였다고 했다. 창궁산에 따로 연락을 보내고 우선 여정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의 고통을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해 잠시 지체할 것인가. 사존의 가르침에 충실한 녕영영의 제자들은 망설임 없이 전자를 선택했다.

잘 키운 제자 하나, 열 제자를 훌륭하게 키워내는구나! 심청추는 정말이지 흡족했다.

딱 하나만 제외하면.

소제자가 혼자 도착한 날은 심청추의 생일까지 꼬박 일 주일이 남아 있었다. 생일에 맞춰 다같이 모였을 때 선물을 드려야 한다는 사손들의 뜻에 따라 심청추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기로 했다. 아무튼 일행의 마물 퇴치가 다소 늦어진다는 기별을 받고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던 소제자는 처음의 어색함을 걷어내자 본격적으로 심청추를 따라다녔다. 서책을 읽을 때도, 한가로이 금을 탈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심지어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사조께서는 사숙과 잠자리에 함께 드십니까?”

별안간 나타난 소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을 때, 심청추는 은근히 허리를 더듬던 낙빙하의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시간이 몇 시인데 대체 왜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거야? 심청추는 속으로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내가 시,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어 잠시 부른 것이다.”

별안간 내쳐진 낙빙하의 억울한 시선이 뒤통수에 따갑게 와서 꽂혔지만 심청추는 애써 외면했다. 어린아이 앞이니 교육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낮게 중얼거린 말이 낙빙하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심청추는 소제자가 어서 방으로 돌아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제자가 성큼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럼 혹시 사조께 몇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일 하거라.”

낙빙하가 소제자의 앞을 가로막고 대신 대답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늦지 않았는데…….”

“사존께서는 초경이면 잠에 드셔야 한다.”

심청추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빙형, 거짓말도 정도껏이지. 내가 저녁 일곱 시에 잠든다니 너무 이르지 않냐구!

그러나 소제자는 무안할 만큼 단호한 낙빙하의 말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소중하게 품고 있던 종이를 펴서 뭔가 바쁘게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사조께서, 잠드시는 시각은, 초경. 그럼 사숙께 대신 여쭙겠습니다. 사조께서 기침하시는 시각은 언제입니까?”

뜻밖의 학구열에 당황한 낙빙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평소에는 묘시에 하루를 시작하시지만 전날 다른 일이 있으면 오시가 될 때까지도 주무시게 두곤 한다.”

“그럼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가요?”

“보통 삼 일에 한 번이다.”

“빙하야, 신경써줘서 고맙구나. 어서 가서 자거라. 그리고 너도. 궁금한 게 있으면 내일 모두 답해 주겠다.”

낙빙하와 소제자의 문답이 이어지자 심청추는 얼른 두 사람 사이를 끊어 놓았다. 예상치 못한 축객령을 들은 낙빙하가 얼른 그렁그렁한 표정을 해 보였고, 이에 질세라 소제자도 다소 예법에 어긋나지만 아이다운 어리광을 부렸다.

“사존…….”

“사조…….”

두 사람에게 양쪽 소맷자락을 잡힌 채 심청추는 생각했다. 녕영영, 우리의 구 히로인, 대체 제자한테 뭘 가르친 거야?!

이틀째 되던 날 심청추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소제자는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으며 심청추의 지난날 자잘한 업적들을 줄줄 읊어 댔다. 그리 별 일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다, 심청추가 이렇게 대답할 때마다 아이는 극구 부인했다.

“사조께서는 최고십니다! 사조만큼 대단한 분은 이 수진계를 통틀어 더는 없습니다!”

분명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 놓고 자기가 더 들떠 있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렇지만 접선 너머로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던 심청추는 당장이라도 청정봉에 돌아가 소리치고 싶었다. 나에 대한 쓸데없는 전설을 만드는 건 제발 그만둬! 그러지 않았다간 앞으로도 매 해 이토록 집요한 사손을 맞이할 때마다 얼굴이 터져 버리고 말 테니까!

우상에 대한 어긋난 학구열이 넘치는 소제자는 매번 심청추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책을 꺼내 무엇이든 받아적었다. 심청추는 그 내용이 매번 몹시 궁금했으나 차마 보여달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심청추는 우연한 기회를 맞닥뜨렸다. 소제자의 지나친 관심과, 그 관심에 대한 낙빙하의 관심을 이기지 못한 심청추는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오라고 두 강아지를 등 떠밀어 내보냈다. 혼자만의 여유를 부릴 겸, 환기도 시킬 겸 소제자의 방에 들렀던 심청추는 침상 위에서 끝이 너덜너덜한 책을 발견했다.

온종일 어찌나 안고 다녔던지 손때가 묻어 책 모서리는 둥글둥글하게 닳아 있었다. 하지만 심청추는 결코 남의 사적인 부분을 들춰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자코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을 뿐이었다. 무심히 휘저은 소맷자락에 걸린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그 안에서 종잇장이 우수수 쏟아져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심청추는 얼른 책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흐트러진 종이들을 주워모았다.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막 보내려던 서신의 일부였는데, 개중 일부는 예전에 받은 답장인 모양이었다. 애써 눈을 가늘게 뜨려 했지만 문득 익숙한 필체에 손길이 멎었다.

이걸 어디서 봤지? 심청추는 생각했다. 그러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춘산한!

온화하고 유려한 필체, 심청추를 제대로 곤경에 빠뜨린 그 책의 저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손의 사생활을 존중하겠다던 결심이 한순간에 바스라졌다.

그러니까 이 까마득한 사손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류숙면화와 긴히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이며, ‘심청추’에 대한 관찰일지를 세밀하게 적어 보내고 있다.

심청추는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이래선 안 된다. 더는 안 된다.

노봉주까지 되어서 은퇴한 마당에 동인계에서는 아직도 내가 현역이라고?! 타비기 대협, 뭐해? 북강에서 한가할 이 시간에 얼른 신간을 써서 유행을 뒤집어 주지 않겠어!

“사존, 여기 계셨나요?”

뒤에서 낙빙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심청추는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또다시 춘산한과 빙추음에 이은 신작으로 후대 봉주들 앞에 불려간다면, 그때는 정말 십 년 동안 폐관뿐이야!

“사질과 함께 시장에 들러서 옥다과를 몇 개 사 왔는데 차에 곁들여 드시겠습니까?”

서늘한 공기를 훅 몰고 온 낙빙하가 심청추의 등 뒤로 다가왔다.

“아니면 저를 먼저……?”

낙빙하는 자연스럽게 심청추의 몸에 팔을 감고 슬쩍 허리를 매만지려 했다. 거의 동시에 환상에서 깨어난 심청추가 외쳤다.

“낙빙하!”

심청추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는 바람에 낙빙하는 애꿎은 허공을 끌어안고 말았다.

“떨어지거라.”

낙빙하의 눈썹이 처량하게 내려갔으나 심청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

“당분간 접촉 금지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고 또 닷새가 지나니, 낙빙하는 눈에 띄게 초조해졌다. 동침을 약속한 삼 일 간격을 훌쩍 넘기고도 각방을 요구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심청추 역시 방문 앞에서 낙빙하와 헤어져 홀로 침소에 들려니 영 마음이 허전했다. 별로 넓지도 않은 방 안이 이렇게 휑덩그렁하며, 고작 초가을일 뿐인데 창을 휘도는 바람이 저토록 쓸쓸했나 싶었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낙빙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책을 정리하는 심청추에게 슬쩍 몸을 맞대기도 하고, 빨랫감을 들고 오다 일부러 발이 걸려 심청추를 향해 넘어지는 척을 했다. 하지만 심청추는 냉정했다. 은근슬쩍 손을 매만질라치면 가볍게 손등을 때리는 것은 물론, 목욕물을 받아다 놓고 얼쩡거리던 낙빙하 앞에서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심청추 역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소제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단순한 교육상의 문제가 아니다. 이 노봉주의 사회적 체면이 달린 문제란 말이다!

이날 밤 심청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심청추의 방과 허울뿐인 낙빙하의 방은 서로 대칭으로 가구를 놓았으니, 지금 심청추가 기대고 있는 벽의 건너편에는 낙빙하가 누워 있을 것이었다. 겨우 얇은 벽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인데 그 너머의 숨소리가 귓가에 선히 들리는 것 같았다. 심청추는 무심코 벽에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흙벽의 균열을 부드럽게 쓸며 일각이 여삼추 같은 긴 밤을 보내려는데, 문득 낙빙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존, 들리시나요?”

심청추는 퍼뜩 놀라 손을 거두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든 척 감은 눈에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존, 주무시나요?”

낙빙하의 목소리는 몹시 애틋하고, 삼 년은 족히 만나지 못한 연인을 그리는 것처럼 애수에 젖어 있었다.

“제자는 몹시 외로워서 잠들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광오선마도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뒤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주인공 버프 탓인지, 벽 너머로 듣기만 해도 미성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듯했다.

“잠깐이라도 그 방에 건너가면 안 될까요?”

대답해선 안 된다. 안 되는데……. 심청추는 이불 밑으로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 이 스승이 당장 너를 끌어안고 재워 주고 싶구나. 이 말이 목밑까지 차올랐으나, 심청추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린 뒤 가까스로 삼켰다.

대답을 듣지 못한 낙빙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린 시절과 똑같이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벽에 바짝 붙어 애써 잠을 청할 낙빙하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심청추는 벽에 이마를 댄 채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벽 너머에서 낙빙하가 바스락거리며 뒤척이는 소리 역시 오랫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생일 전날, 생기를 잃은 낙빙하는 거의 벽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쯤 되자 아무 잘못 없는 어린 사질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눈앞에서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심청추의 고운 손목과 곧 잡힐 듯한 허리선이 아른거리는데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니. 잠깐이라도 둘만 있을 틈을 주면 안 되는 건가? 정말이지 단 몇 분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소제자는 그런 마음도 모른 채 낙빙하의 주변을 아침부터 내내 맴돌았다. 다음 날이면 약속한 대로 일행이 ‘나머지 선물’을 준비해서 돌아올 예정이었고, 그 말인즉슨 소제자 역시 떠날 날이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심청추에 대한 관심만큼 낙빙하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했다. 그러나 낙빙하의 시선은 항상 심청추를 보고 있었고, 혼자 있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딘지 촉촉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함께 시장에 다녀온 날에도 아이는 내내 조잘거렸지만 낙빙하는 몇 마디 대꾸할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결국 호시탐탐 말을 붙일 기회를 노리던 소제자는 슬쩍 낙빙하의 옆에 다가가 물었다.

“사숙, 사숙께서는 어떤 축하 선물을 준비하셨습니까?”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낙빙하는 간단히 대답했다.

“……책이다.”

“어떤 책인가요? 심 사조께서 책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청정봉 서가에 있던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다. 마지막 권을 구할 수 없어 계속 아쉬워하셨는데, 수소문 끝에 이 마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분이 이 마을에 머무시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래.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인 셈이니 사존께서도 기뻐하시겠지.”

그 말을 하면서 낙빙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거의 처음으로 심청추가 아닌 자신 앞에서 낙빙하가 웃는 모습을 본 소제자는 몹시 마음이 들떴다.

“그 책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복원을 맡겨 두어서 아직 책방에 있다.”

“그럼 혹시 제가 대신 심부름을 다녀올까요?”

그 말이 나왔을 때 낙빙하의 눈에 퍼뜩 이채가 돌았다. 아이가 마을에 내려갔다 돌아오려면 꼬박 한 시진은 걸릴 터였다.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단 둘이 있을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 충분했다.

낙빙하는 더 고민할 틈도 없이 승낙했다.

빠른 걸음으로 소제자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낙빙하의 마음 한구석이 켕겨 왔다. 아무리 아이가 먼저 나서기는 했어도 너무 기다렸던 것처럼 아이를 내보냈나 싶어서였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심청추의 시선이 내내 어린 사질을 향하고 있는 것에 여러 차례 마음이 내려앉은 것은 사실이었다. 당연히 질투라고 하기에 터무니없는 감정이었다. 낙빙하 역시 어린아이를 대하는 심청추의 마음을 알았고, 심청추의 곁에 자신만의 자리가 항상 마련되어 있음 역시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한 번 칼로 도려낸 자리에는 새 살이 돋아난 뒤에도 흉터가 남아 간혹 거짓 통증을 가져오기도 하는 법이었다.

이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지났음에도 낙빙하는 간혹 심청추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 속에서 낙빙하는 심청추를 데려가려는 모든 것들을 제 손으로 일일이 부수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날에는 목 뒤가 시큰하게 젖어 있었다. 낙빙하는 두려웠다. 심청추가 떠날까 겁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한때 심마가 깃들었던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했다.

심청추의 시선을 갈망하며 오직 그가 아는 유일한 빛을 맹목적으로 쫓는 비틀린 어둠이, 의식하지 못한 순간 서서히 잠식하듯 그 빛을 전부 집어삼켜버릴까 봐.

낙빙하는 고개를 털어냈다. 기우였다. 고작 짧은 심부름일 뿐이다. 더구나 이미 낙빙하의 온 마음과 발걸음은 심청추에게로 급히 향하고 있었다. 낙빙하는 금방 걱정하던 것을 잊었다.

 

 

마을로 내려간 소제자는 착실하게 낡은 책을 받아든 뒤 소중히 품에 안았다. 수련이 모자라 속도도 빠르지 않은데다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팠지만, 산을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단지 낙 사숙께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심청추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지만, 소제자는 낙빙하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들어 알고 있었다. 구전되고 약간은 비틀린 이야기는 입에서 입을 거치면서 실제와는 다소 달라져 있었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전해져 왔다. 바로 혈혈단신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외로운 소년의 삶이 창궁산에서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제자는 낙빙하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어린아이는 홀로였다. 선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낙후된 마을에서 혼자 거리를 떠돌던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미움받는 것이 몸에 배고, 필요없어 내쳐지는 것이 익숙한 아이는 어디서든 존재감을 감추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웠다.

그 날도 먹고 남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점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배가 고픈 탓도 있었지만 그 가게에는 이야기꾼이 곧잘 와서 수선계 사람들의 미담을 늘어놓곤 했기 때문에, 아이는 뒷문에 숨어 몰래 엿듣기를 좋아했다. 이야기에 푹 빠져 있노라면 고픈 배에서 나는 볼썽사나운 꼬르륵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고, 돈이 없어 사먹을 수 없는 음식도 이야기 속에서는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창궁산파에 대한 것이었다. 열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봉마다 상상조차 못할 힘을 가진 선사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했다. 신선처럼 구름을 타고 날기도 하고, 공후를 불면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데다, 무시무시한 마물과 백 번을 싸우고도 다시 일어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머나먼 이야기를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그 때 누군가 불쑥 아이에게 만두를 내밀었다.

“……먹으면서 들어.”

한 번도 사람과 눈을 마주쳐 본 적 없는 아이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모를 여수사의 목소리는 낮고도 다정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 주점 뒷문을 서성이던 아이는 그들이 실제로 창궁산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안 돼.”

여수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이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 자신에게 무엇을 기꺼이 내주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네가 조금만 더 크면 네 스스로 올 수 있을 거야. 그 때까지 혹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얇은 너울 너머로 여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웃고 있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다정이 배어 있었다.

“이 쪽으로 편지를 써도 좋아.”

여수사는 종이를 찢어 주소를 적은 뒤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그 주소를 읽기 위해 글자를 배웠고, 편지를 쓰기 위해 문장을 익혔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서신이 방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일 적마다, 창궁산은 아이의 꿈이었고 이야기가 되었다.

소제자는 품 안의 책을 더욱 꼬옥 쥐었다. 활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뭉치는 안고만 있어도 심장이 뛰는 듯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심 사조께 드릴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고작 마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심부름일 뿐이었지만, 소제자는 정말로 잘 해내고 싶었다. 누군가 자신과 눈을 마주쳐주고 귀기울여 준 귀한 경험을 처음 겪어 본 아이는 두 번 다시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움켜쥐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대가 크면 별 것 아닌 일에도 마가 끼는 법이었다. 해가 지기 전 돌아가고 싶어 급한 마음에 서둘러 걷던 아이는 그만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필 그 순간 품에서 떨어진 책이 펼쳐지면서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휩쓸렸고, 수선이 덜 된 낡은 책장들이 흩어져 날아갔다.

“……!”

아이는 무릎이 까진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흐트러진 종이를 줍기 위해 달려나갔다.

 

 

“읏……. 빙하야.”

“왜 그러십니까?”

“잠깐, 잠깐 떨어지거라. 여기서는…….”

심청추의 목소리 끝이 떨리더니 점차 잦아들었다. 말로는 밀어내려 하면서도 두 팔은 낙빙하의 목과 어깨를 끌어안은 채 놓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낙빙하는 한 팔로 심청추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른 팔로는 무릎 아래를 살짝 받친 채, 주방의 작은 걸상 위에 심청추를 아슬아슬히 걸쳐 놓고 있었다. 낙빙하의 옷깃은 이미 밀가루로 얼룩덜룩했고, 방금 전 얼굴을 묻은 탓에 심청추의 목덜미에도 새하얀 자국이 번졌다.

“그럼 제자가 방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심청추는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낙빙하는 얇은 옷깃 너머로 살짝 스치는 살갗의 온도만으로도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낙빙하가 냉큼 속삭였다.

“계속 고개를 저으실 겁니까, 이렇게 오랜만인데도요?”

낙빙하는 짐짓 눈썹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어리광을 피웠다. 방금 전 심청추는 잔뜩 기대를 품고 달려온 낙빙하에게 반가운 내색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둘만 남았다니 잘 되었구나, 그럼 당장 내일 방문할 청정봉 제자들을 위해 생일 음식을 준비하자꾸나!

사실 심청추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야 빙형, 절대 한 시진으로는 끝날 리가 없잖아? 고작 이틀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려무나, 인고에는 반드시 복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심청추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낙빙하는 그만 불이 붙고 말았다. 순순히 주방으로 따라온 뒤 국수 반죽을 만드는 체하며, 이리저리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늘어놓던 심청추를 품 안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이러면 옷이 더러워질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제자가 여분의 옷을 여러 벌 개어 두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시간이…….”

“잠시라도 사존의 온기를 느끼고 싶습니다.”

낙빙하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물러나지 않은 채 부러 심청추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짙은 숨결이 귀밑머리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심청추의 몸이 살짝 떨렸다. 계속 병아리처럼 요구하듯 턱끝을 따라 쪼아대는 낙빙하의 채근에 맞춰 심청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주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호흡이 섞이고, 서로에게 응하듯 익숙하게 탐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선사님!”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선사님들! 큰일 났습니다!”

그 목소리는 문 밖에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다급하게 대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발소리는 곧장 주방 쪽을 향해 달려왔다. 곧이어 미처 고르지도 못한 숨을 헉헉거리며 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바닥으로 내려오는 것도 잊은 채 심청추가 물었다. 엉겁결에 지나치게 바짝 붙어 있던 두 사람을 목격했지만, 촌장은 이미 익숙해진 나머지 얼굴조차 붉히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느라 핏대가 선 목소리로 조급하게 말했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심청추는 손 안에서 낙빙하의 옷자락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미처 한 마디 말할 틈도 없이 낙빙하는 촌장을 제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빙하야!”

심청추가 뛰어나왔을 때 낙빙하는 이미 경공을 사용해 산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뒤였다.

 

 

서편으로 향할수록 점점 불길하리만치 붉어지는 그림자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마을을 한 번 휘감고 도는 강의 상류는 비가 많이 온 직후라 더욱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몰아치고 있었다. 강가로 착지한 낙빙하는 곧바로 물살에 휩쓸린 어린아이의 그림자를 찾았다. 소제자는 한 손으로 바위를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급류에 떠밀려내려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하면서도, 아이는 팔을 뻗어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사숙……!”

망설임 없이 강물에 뛰어든 낙빙하가 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소제자는 낙빙하를 보더니 더욱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죄송, 죄송해요……. 제가 다 망쳤어요. 사숙께서 부탁한 책이…….”

그제서야 낙빙하는 아이의 한쪽 팔 안에 너덜너덜하게 젖은 종잇장이 움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지금 당장 나가야……!”

“안 돼요, 찾을 수 있어요…….”

추위 때문에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연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무심코 낙빙하의 팔을 쳐낸 아이는 방금 떨어져나간 낱장이 흘러간 쪽으로 헤엄쳐 가려다, 그만 이끼가 끼어 미끄러운 바위를 헛디뎠다. 낙빙하가 얼른 아이를 안아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부족해서……. 전부 다 제 잘못이에요…….”

마구 입 안에 쏟아져들어오는 물을 삼키느라 아이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낙빙하의 아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기엔 충분했다.

낙빙하는 처음 자신의 이름이 지어진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제 이름 세 글자를 입 안에서 굴릴 때마다 낙천에 흘러내려오던 작은 나무 상자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재구성된 기억 속에서 낙빙하는 항상 멀찌감치 떨어진 채 그 상자를 지켜보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아이를 지켜주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허락되지 않은 핏줄을 타고난 아이의 호흡이 그 안에서 다하기를 바랐던 것인지 나무 상자의 뚜껑은 아주 단단히 못박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상자에서 꺼내졌을 때 낙빙하는 두 번째로 태어났다. 그 때 낙빙하의 세상은 전부 어머니였다. 한 사람에게 기대는 삶은 안온하고도 잔인한 것이어서 오래 지나지 않아 부서지고 말았다. 낙빙하가 다시 꽁꽁 언 겨울 강가에 내려왔을 때, 아이는 단 한 가지만을 바랄 줄 알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어머니를 위해 어죽을 끓여 주고 싶었다.

얇은 강 표면 아래에는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이걸 부수고 물고기를 꺼내기만 하면 돼. 그럼 아랑이 먹을 수 있어. 오로지 이 말만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던 어린 낙빙하는 부르튼 맨발로 얼음을 딛고도 추운 줄을 몰랐다. 낙빙하는 끝이 날카로운 돌을 양손으로 쥐고 얼음의 갈라진 부분을 내리쳤다. 그게 실수였다. 순식간에 균열이 벌어진 얼음은 아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살려주세요, 살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먹먹해진 귓가에서는 제 목소리만 웅웅 울렸다. 언 강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아무도 이름모를 아이를 위해 다가와 주지 않았다.

그 때 낙빙하는 강이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잉태한 어둠이 다시 그 보잘것없는 생명을 집어삼키기 위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 어둠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네가 그 상자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아랑이 머물던 집에서 쫓겨날 일도,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빨래를 해야 할 일도 없었을 테지.

두 번째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야.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팔열팔한의 수라였는데, 왜 굳이 빛이 있는 곳으로 기어올라왔나? 그 결과가 어땠는지 봐. 사존께서 스스로를 한없이 쪼개어, 그 혼자서는 다 덮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에 뛰어들지 않았나.

네가 상자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모두 없었을 일인데.

낙빙하의 몸이 굳었다. 아이를 끌어올리려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별안간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낙빙하는 영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어둠이 물 속에서 스멀스멀 형체를 만들고 발목에 엉겨붙었다.

어둠이 속삭였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야.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네가 품고 태어난 심연은 결국 누군가를 갉아먹게 되어 있잖아. 너는 이 강에서 태어났고,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낙빙하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두 팔을 뻗어 아이를 감싸안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잡념을 털어내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낙빙하는 바닥에 있는 바위를 강하게 걷어차고 물살을 거스르려 했다. 그 때였다. 별안간 뻗어져나온 손이 낙빙하의 팔을 붙들고 강하게 끌어올렸다.

“빙하야!”

검을 타고 바짝 내려온 심청추가 빠르게 두 사람을 낚아챘다. 물에 젖은 몸이 검 위로 가까스로 발을 딛자 반쯤 넋을 잃은 낙빙하의 몸이 휘청였다.

심청추는 얼른 강가에 착지해 쫄딱 젖은 둘을 내려놓았다. 심청추의 입모양이 계속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낙빙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자신을 끌어당겨 몸을 데우기 위해 영기를 주입하는 심청추의 손을 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 생에서 그는 세 번 마음이 죽었다. 낙천에서, 무간심연에서, 그리고 화월성에서. 가장 믿어야 했을 사람에게서 버려진 순간 낙빙하의 마음은 심연으로 끌려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유일한 빛이 눈앞에서 꺼져 버리는 것을 목격한 순간 낙빙하는 깨달았다. 앞의 두 죽음은 사실 어둠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품기에는 분에 지나친 빛,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빛을 질투하고 빼앗기 위해 눈을 가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잃어버릴까 두려워 매달리던 것을 손에 쥐기 위해 발버둥치다 바스라뜨린 뒤에야 낙빙하는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그 작고 한없이 빛나는 광원은 단 한 순간도 제 손에서 벗어나려 한 적 없었다. 죽사 뒤에서 처음으로 제 것이 된 이불과 옷가지를 차마 펴보지도 못한 채 아까워 조심스레 끌어안고 잠들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사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따뜻한 물이 있습니다.”

“수건도 쓰세요!”

언제부터인지 몰려든 사람들이 이것저것 가져온 살림살이를 수북하게 건네었다. 어느 틈에 물에 푹 젖었던 소제자는 수건에 둘러싸여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고, 낙빙하의 어깨에도 몇 개의 겉옷이 얹혀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낙빙하가 몸을 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자는 영력으로 몸을 말리면…….”

“그래도 쓰고 있거라. 사람들이 걱정한다.”

양 손으로 낙빙하와 소제자의 손목을 잡고 영력으로 몸을 말려주던 심청추가 부드럽게 말렸다.

“나도 걱정하고.”

그 순간 심청추는 낙빙하의 눈가에 감동의 눈물이 핑 도는 모습을 본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얘들아, 이게 다 무슨 일이니! 아이고, 남강 바닥을 말리던 과거의 혼세마왕 이제 다 죽었구나! 심청추는 젖은 머리카락의 낙빙하가 눈썹을 늘어뜨린 모습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혼자 뛰어들어서 놀랐지 않느냐.”

물론 네 마음은 이 스승이 갸륵히 여기지만, 물에 뛰어드는 것보다 좀더 나은 방법이 있었지 않으냐. 그러나 심청추의 굳은 표정을 잘못 이해했는지, 낙빙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존, 잘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사조, 전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그러자 옆에 앉은 소제자가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아니다, 너희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선 좀 마시거라. 자, 자!”

심청추는 두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얼른 마을 사람에게서 잔을 받아들고 마시도록 종용했다.

“심 선사님께서 아이를 구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강가를 울렸다. 객잔에서 한껏 흥에 겨워 있던 이야기꾼의 목소리였다.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린 강가에는 등불을 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반딧불이 같은 빛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 불빛들이 여전히 세찬 기세로 흘러가는 강물에 비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역시 심 선사님이십니다!”

“새로운 영웅담이 늘었군요!”

잔뜩 신이 난 마을의 이야기꾼과, 영광에 눈물을 흘리는 소제자 그리고 원래 서 있었지만 기립 박수를 치고 있는 마을 사람들 틈에서 심청추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아무튼 지금 심청추는 정말이지 곤란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은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이목을 끌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한 팔에는 수건에다 코를 풀고 있는 어린아이를 받쳐들고 다른 팔로는 낙빙하의 손을 꼭 잡은 채 인파를 뚫고 나가려던 심청추는 누군가의 격앙된 외침에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저길 봐!”

“뭐라고 써 있는 거지?”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어둠이 내린 하늘 위로 환한 불꽃이 번졌다.

‘수아검 심청추, 영원한 청정봉의 백세지사百世之師’

심청추는 생각했다.

지금 저 하늘에 써 있는 게……. 정말 내 이름인가?

“사형! 사저!”

소제자가 심청추의 품에서 퍼뜩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으로 강 건너편을 가리켰다. 덩달아 고개를 돌리자 그 쪽에는 청의를 입은 제자들이 한 무리 서 있었다. 그 중 누군가 확음술을 썼는지, 온 산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이렇게 외쳤다.

“심 사조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 사존의 선물이에요!”

품에서 뛰어내린 소제자가 방방 뛰며 소리쳤다. 멍하니 올려다보던 심청추는 귀끝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다른 봉에서 보내 온 문구가 연달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녕영영, 무슨 짓을 한 거야! 타비기 대협, 그 쪽도 반성해. 새 안정봉주는 이런 일에 예산을 편성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제자로 키워낸 거야?

“심 선사님 생일이 내일이라고?”

“저런, 우리라고 가만 있을 수는 없잖아!”

“내일은 마을에서 잔치를 합시다!”

주변에서 심청추의 생일을 처음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말을 보탰다. 결국 심청추는 사람들 틈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연화는 온 몸을 다해 가진 빛을 터뜨리고도 어둠에 붉게 물든 여광을 남겨 두었다. 소제자는 어느 틈에 다 마른 옷자락을 펄럭이며 사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심청추는 문득 제 손 안에 여전히 낙빙하의 손이 꽉 쥐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제서야 심청추가 고개를 돌렸을 때, 언제부터인지 계속 제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낙빙하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낙빙하의 검은 눈동자에 빛의 잔흔이 담겨 따뜻한 불꽃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 가끔은 이토록 성대하고 조금은 왁자지껄한 생일도 좋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한담과 객설을 만들어 내더라도 다 무슨 상관인가. 이야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단 한 가지만 변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아마 심청추는 몰랐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그 이야기 속의 한 사람을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이야기의 일부가 된 순간부터 정해진

아니,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심청추는 어디까지나 작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도 진취적인 독자니까.

 

 

류숙면화 선생님께.

그간 보내드린 일 주일 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제 이야기가 이번 신간에 도움이 되어 정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 책의 제목이 ‘낙천화독명洛川火獨明’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절하실 것은 알고 있지만, 언젠가 저도 읽어볼 수 있을까요?

심 사조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참, 그리고 제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답니다.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사조의 곁에 계신 사숙을 보니까 저도 나중에 그렇게 살고 싶어졌어요.

제게도 백년가약의 반려가 생기는 날이 올까요?

아무튼 다음 편지에는 낙 사숙이 어떻게 심 사조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세요!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청정봉에서.

 

 

그 다음 날은 정말 숨가쁘게 지나갔다. 시끌벅적한 사손 일행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선사들과 함께 허물없이 섞여 놀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의 작은 집은 사람들의 온기로 꽉 차 있었다.

이에 질세라 아침부터 날아든 전서구가 몇몇 그리운 사람들의 선물을 전해 주었다. 녕영영에게 기분 좋게 패배한 뒤 청정봉을 떠나 세상을 유람하는 명범은 직접 쓴 문장을 적어 보냈다. 복을 기원하는 글씨는 심청추를 닮아 유려하고 시원시원하게 뻗어져 있었다. 류청가의 선물은 양 봉주를 통해 대신 전해져 왔는데, 꾸러미에서 뭔가 살아있는 것이 꿈틀거리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섣불리 열어볼 수 없었다. 악청원은 산수화와 악보를 몇 점 보내 왔고 상청화는 자신의 서명이 된 책을 한 보따리 보내왔는데, 심청추는 그 책이 낙빙하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스레 옷자락으로 덮어 두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가 또 부족했습니다.”

심청추는 얌전히 양손을 모으고 서 있는 낙빙하에게 손을 뻗었다. 함께 선물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동안 낙빙하는 줄곧 시무룩해 있었다. 사질에게는 어른스럽고 싶었으나 열심히 구해 온 선물을 줄 수 없게 되었으니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이틀 내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질 지경이었다.

“정말 원하시는 것을 드리고 싶었는데, 제자는…….”

“사존이 미안하구나.”

낙빙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심청추가 부드럽게 웃었다. 낙빙하는 얼른 부인하려 했지만 심청추는 놓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저는…….”

“그럼 이렇게 말할까?”

심청추가 말을 이었다.

“사존이 고맙구나.”

낙빙하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굳었다. 낙빙하는 얼른 손을 빼고 자세를 고쳐 어떻게든 예의를 표하고 싶어했지만, 그대로 팔을 벌린 뒤 성큼 다가온 심청추의 품 안에 잡히고 말았다.

“…….”

가끔 심청추는 되돌릴 수 없는 몇 년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곤 했다. 제 손으로 떠민 암흑 속에서의 삼 년, 텅 빈 몸을 끌어안고 보낸 오 년. 그 시간 동안의 낙빙하를 만든 것은 자신의 부재였다.

혼자서 버텨내게 해 주어 미안하구나. 그리고 동시에, 내가 곁에 있어주지 못한 시간에도 이렇게 자라 주어서 고맙구나.

심청추의 품 안에 온몸을 접어넣고 싶기라도 한 듯 응석받이처럼 웅크린 낙빙하가 중얼거렸다.

“제자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게 있어야 내가 계속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심청추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언 강에서도 이제는 건져 줄 손이 있다. 네가 허물어질 때마다 그 빈 곳을 메꿔 줄 수 있는 내가 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작은 빛이면 몰아낼 수 있다.

물론 낙빙하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빛이지만.

“사존…….”

“……빙하야?”

한 번 깊은 포옹을 나눠준 뒤 위엄 있게 물러나려던 심청추는 어느 틈에 제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팔 힘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말았다. 낙빙하는 거의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세게 끌어안았고, 덕택에 바짝 밀착한 허벅지로 단단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며칠이나 이렇게 끌어안지도 못했더라. 심청추는 들고 있던 접선으로 낙빙하를 밀어내는 대신 슬쩍 손목을 털어 펼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낙빙하에게 입을 맞췄다.

아무도 안 보는데 왜 가리냐고?

글쎄, 어떤 이야기든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떤 것들은 보여주지 않을 때 더 매력적인 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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