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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알림! 내일은 심청추의 생일입니다. 일 년 중 하루뿐인 날을 즐기시길!]

 

 

“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시스템의 번역기 같은 말투가 또다시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한순간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그것은 심청추가 팔랑거리는 부채질과 함께 흔적도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심청추는 시스템의 ‘YOU CAN YOU UP, NO CAN NO BB’를 해냈기 때문에 예전처럼 사이다 수치나 다른 수치들을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난 게임이어도 이렇게 가끔씩 이벤트를 열어주니 얼마나 소비자를 생각해주는 운영자란 말인가. 시스템의 보살핌에 심청추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심청추의 생일이라는 건 심구의 생일인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내일은 내 생일이기도 한데... 심청추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부채를 이용해 미약한 바람을 일으켰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것 또한 운명이라면 참으로 기묘한 것이었으니. 심청추는 생각난 김에 물어보기 위해 다급히 마음속으로 외쳤다.

 

 

“시스템, 아직 있어?”

 

[무슨 일이신가요?]

 

“생일 말이야, 이거 <광오선마도>의 심청추 생일이야?”

 

[......]

 

“시스템?”

 

[<광오선마도>의 심청추는 생일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청추’ 본인도 자신의 생일을 알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귀하가 살아계셨을 때의 생일로 연동시켜드렸습니다.]

 

 

…젠장, 젠장, 젠장! 물어보지 말걸, 괜히 마음만 더 무거워졌잖아! 운명 따위는 개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런 질문을 한 거야?!

 

심청추는 시스템의 답변에 왜인지 모르게 달아오른 얼굴을 바람으로 식히며 애써 가라앉히고자 했다. 화끈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사라지자 침묵이 뒤늦게 찾아왔다. 괜스레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시스템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생일이 없다고? 향천타비기 네 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름 남주의 사존이었건만 생일 하나를 설정 안 한 거냐! 입이 있으면 말해보시지 향천타비기!

 

누가 들을세라 마음속으로만 등신 작가를 욕하다가 화낼 기력도 없어진 심청추는 한숨을 내쉬며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심구의 과거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처참하고 잔혹하고 비참하고, 마침내 질투에 눈이 멀었던 그의 모습을. 솔직히 말해서 그런 과거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심원 자신은 한평생 그런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문득,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그동안 자신이 보냈던 생일날을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만 같았다. 심청추는 쩝,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 뭐가 좀 있으려나….”

 

 

심청추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죽사를 나섰다. 늦은 밤, 그 어떤 것보다 높게 떠오른 달이 조용히 심청추의 뒤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자시(子時, 23시~1시)가 곧이었다.

 

 

 

* * *

 

 

 

“뭐, 차린 건 없지만 눈요기라도 해.”

 

 

심청추는 자신의 맞은편에 빈 술잔을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에 한 번, 맞은편의 잔에 한 번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잔과 잔 사이에 있는 둥그런 접시 위로 온갖 종류의 유과가 쌓여있었다. 형형색색의 유과는 시간이 지난 탓에 바삭함보다는 푸석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사람이 먹을만해 보였다. 심청추는 각자의 빛깔을 뽐내는 유과 중 연두색의 것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바삭함과 함께, 꿀보다 다디단 것이 입안으로 들어와 부서졌다. 입안을 은은하게 맴도는 참기름과 꿀의 향이 퍽 조화로웠다. 누가 만들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큼 심청추의 입맛에 맞춘 것이었다. 심청추는 날이 가면 갈수록 느는 제자의 실력에 감탄하며 자신의 한쪽 팔로 얼굴을 괴었다. 슬쩍 눈꺼풀을 감아 내리더니 제 앞에 놓인 유과를 보고 상념에 빠진 듯했다.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놀라겠지. 당신이 그렇게 질투하고 증오하던 자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하면 믿을지 모르겠네. 하긴, 나였어도 안 믿을 거 같긴 해. 그도 그럴 게 <광오선마도>의 닉빙하는 전혀 그럴 놈이 아니잖아? 특히나 당신에게는 더욱."

 

 

심청추는 말을 멈춘 채 살짝 떨리고 있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여러 번 톡톡 쳤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도, 그 아이도.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 서툴렀던 것이겠지. 누군가를 위하기보단 살아남는 게 급급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겪은 감정들을 전부 이해할 순 없어.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것도, 버려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그렇지만….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건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아. 어찌 보면 나도 죽기 싫어 동아줄을 붙잡는 셈이었으니.”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 심청추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듯한 소리를 희미하게 내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술이 따라진 잔을 들어 올렸다. 맞은편에 놓인 잔에 자신의 잔을 갖다 대자 유리끼리 부딪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잔에 담긴 술이 넘실거렸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생일 축하해.”

 

 

심청추는 말과 동시에 자신의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입안으로 흘러넘치는 술이 평소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술을 마시기 전 단것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쓰라려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것이든 썩 듣기 좋은 변명은 아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 * *

 

 

 

“...존, 사존!”

 

 

귓가를 파고드는 외침에 심청추는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심청추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렸다. 이윽고 어둠으로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햇살을 받아들이며 동공이 한껏 수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침햇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인영으로 인해 차단되고 말았다. 그 인영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심청추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사존.”

 

 

…아, 빙하구나.

 

심청추는 뻑뻑한 두 눈을 껌뻑거렸다. 자신의 뺨에 닿은 보드라운 입술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피부로 느끼며 몇 차례 낙빙하의 머리를 쓰다듬은 심청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낙빙하는 심청추에게 물었다.

 

 

“속은 괜찮으신가요, 사존?”

 

“응? 갑자기 왜 묻느냐?”

 

“그것이.. 상 위에 빈 술병이 놓여있어서.. 어젯밤에 다른 분과 드신 것 같아 여쭈어보았습니다.”

 

 

심청추는 낙빙하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간밤에 심청추가 술을 마셨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깔끔하게 비워진 잔 하나와 여전히 가득 차 있는……, 어라?

 

 

“...빙하야.”

 

“네, 사존의 빙하 여기 있습니다!”

 

“잔에 따라져 있던 술을 마셨느냐?”

 

 

심청추의 물음에 낙빙하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심청추는 자신이 착각했다며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낙빙하를 진정시켰다. 심청추는 상 위에 놓여있는 빈 잔 두 개를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젯밤엔 자신의 잔만 비운 채 다른 잔은 건드리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간밤에 도둑이 들었나? 그건 또 아닐 것이다. 한밤중에 죽사를 찾아와서 술만 마시고 가는 미친자는 없을 것이니. 설마, 그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정답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가까이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청추는 귀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닭살이 돋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귀신이 들린 듯한 느낌을 떨치고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낙빙하의 손길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빙하는 심청추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누르며 다시 침상에 걸터앉게 하자 심청추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낙빙하를 쳐다보았다. 낙빙하는 묘하게 들뜬 표정을 지으며 심청추를 내려다보았다.

 

 

"사존. 잠시만 눈을 감아주세요."

 

"응? 무얼 하려 그러느냐. 사존을 놀리려는 것은 아니고?"

 

"제자가 어찌 사존에게 그런 짓을 할 리가요. 잠깐이면 됩니다."

 

 

낙빙하의 말에 심청추는 짧게 웃으며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낙빙하가 죽사를 나서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미약한 꽃내음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심청추는 시각이 차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감각이 발달한 상태라 코끝을 맴도는 꽃향기가 점점 진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모른 척 표정을 관리하며 자신의 제자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리라 생각했다. 낙빙하의 옷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빙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존."

 

 

그 말 한마디에 심청추는 눈에 힘을 주었던 것을 풀었다. 서서히 눈꺼풀이 올라가며 그의 눈동자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꽃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꽃송이들을 두 손으로 쥐고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낙빙하까지도. 꽃이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가히 선녀가 강림하였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그 모습에 심청추는 누가 키운 제자인지 모르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제 사존의 미소에 낙빙하도 활짝 웃으며 사존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자가 더 좋은 것을 준비해드리고 싶었는데... 사존을 보면 꽃이 생각나서 무심코 꽃을 가져왔습니다."

 

"내가 그리 꽃 같더냐. 더 할 말은 없고?"

 

"그리고 이 말도 사존께 가장 먼저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낙빙하는 말을 끝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꽃을 든 두 손이 잔잔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진 듯 조용하게 떨렸다. 그 말 한마디가 무엇이라고 이리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심청추는 눈웃음을 지으며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낙빙하를 재촉했다.

 

 

"응? 무슨 말?"

 

"생일... 생일 축하드립니다, 사존! 그동안 한 번도 챙겨드리지 못했던 게 생각나서 제자는 그만..."

 

"어허, 그만하면 되었다. 무슨 사족이 그리 긴게야."

 

"사조온..."

 

 

낙빙하는 심청추의 질책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이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심청추는 낙빙하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받아 침상 옆에 둔 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낙빙하를 꽉 끌어안았다. 앉아있는 자세 탓에 심청추의 키가 더 높아 영락없이 사존의 가슴에 안긴 제자의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낙빙하는 이마저도 좋은 것인지 자신의 얼굴을 더 깊이 파묻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심청추는 아까보다 더 곱슬거리는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고맙구나. 사존을 위해 아침부터 꽃을 따오느라 고생했겠어."

 

 

심청추는 낙빙하만 들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그를 꼭 껴안았다. 품 안을 가득 채운 온기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현실 세계에서 스승의 날에 제자에게 꽃을 받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심청추는 그러한 감정의 의미를 모른 채 그저 자신의 품에 안긴 낙빙하를 더욱더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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