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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완결 스포 있습니다.

“사존, 아침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큰 손이 심청추의 손을 감싸 쥐었다. 목소리와 손길이 잠을 깨우고 익숙하고도 좋은 향기가 의식을 두드려 심청추를 움직였다. 느릿느릿 눈을 뜨자, 언제 봐도 눈이 맑아질 만큼 잘생긴 얼굴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보아온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이제 볼 때마다 찬탄을 늘어놓게 되지는 않았으나, 이성이 아닌 본능의 영역에서 감탄하게 되는 것은 저 얼굴을 매일같이 보고 살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주무시겠습니까?”

낙빙하는 손가락을 뻗어 심청추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스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지러워 심청추는 살짝 몸을 떨었다. 눈을 깜빡이자 눈앞에 있는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손에 잡힐 것 같이 분명한 애정이 뚝뚝 흘러, 손길과는 다른 이유로 속이 간질거렸다. 오래 바라보기가 민망해 슬쩍 시선을 돌리자 탁자 위에 차려진 아침이 보였다. 방금 만들어 가져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더 자겠다고 하면, 낙빙하는 웃으며 더 주무시라 할 것이다. 다시 잠든 심청추가 음식이 식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껏 만들어놓은 음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올 것이다. 그냥 식은 것을 먹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낙빙하는 사존께 식은 음식을 드시게 할 수는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늘 고집스럽게 새로 음식을 차려 내왔다. 심청추는 기껏 만든 음식을 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애써 기운을 냈다.

“아니. 이제 일어나마.”

심청추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낙빙하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고, 심청추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침상을 벗어났다. 낙빙하는 요령 좋게 한 손으로 심청추의 옷을 건넸고, 심청추는 그 옷을 걸치고 탁자에 앉았다. 그러면 이제 또 낙빙하는 심청추의 뒤에 서서 심청추의 머리카락을 요령 좋게 묶어주었다. 낙빙하의 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능숙했다. 심청추는 아주 잠깐 그가 낙빙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으나, 심청추의 시중을 드는 낙빙하의 얼굴이 온화한 행복으로 물들어 있어 알아서 하겠다 낙빙하를 만류할 수도 없었다. 심청추는 대충 그는 편하고 낙빙하는 행복하니 좋은 일이라 여기기로 했다.

아침상은 화려했다. 낙빙하가 차린 음식 중 심청추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없었지만 – 과장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이 맛있었으므로 – 오늘은 좀 특별했다. 심청추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상이 채워져 있었다. 잔뜩 솜씨를 부린 티가 났다. 심청추는 아침상을 들여다보다가 낙빙하를 바라보았다. 어째 낙빙하도 평소보다 더 들뜬 것 같았다. 신난 것 같기도 하고,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심청추는 젓가락을 쥔 채 고민에 잠겼다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더냐?”

“오늘은 사존을 위한 날입니다.”

나를 위한 날? 그런 날이 있던가? 심청추는 눈을 깜빡였다.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가득한 상이라니, 꼭 생일상 같았다. 아, 잠깐. 생일? 심청추는 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9월 보름이 지난 지 얼마나 되었던가. 하루, 이틀… 엿새. 벌써?

“음. 날이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예. 생신 축하드립니다.”

낙빙하는 환히 웃으며 그의 이마에 짧게 입맞추었다. 9월 21일.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이라.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생일 축하인지,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 낯설었다. 이 세계에서 축하받는 생일이라니.

작년까지만 해도 심청추는 이 세계에서 생일을 축하받지 못했다. 이유가 있긴 했다. 이 몸이 그가 쓰고 있긴 해도 본래 남의 것이라 함부로 그의 생일이 언제인지 남들에게 밝힐 수 없었고, 다음으론 금단을 맺고 오랜 시간을 사는 선인들은 긴 세월 동안 계속 젊은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 그런지 딱히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심청추가 원래 자기 생일을 그다지 잘 챙기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그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그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어 해마다 자정부터 날아오는 생일 축하로 아, 생일이구나 하고 깨달았지, 축하해줄 사람 없는 이곳에서는 생일이 와도 생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가고는 했다.

줄곧 그렇게 살았는데, 올해 갑자기 낙빙하가 심청추의 생일을 챙기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작년 이맘때쯤, 그들은 한 마을을 지나다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를 보게 되었다. 그 집에서 아이의 복을 비는 의미로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어 그들도 그 음식을 조금 얻어먹었다. 낙빙하는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더니 심청추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존께서는 생신이 언제십니까?”

심청추는 그 순간 잠시 고민했다. 말해도 될까? 광오선마도에는 심구의 생일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향천타비기가 정하기나 했나 의문이었다. 생일도 알아야 챙기지, 이 빌어먹을 소설에서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애초에 심구도 거리에서 자랐으니 태어난 날짜를 알 리 없었고, 그건 낙빙하도 마찬가지였다. 낙빙하가 겨울에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 메타적인 사정은 뒤로 하고, 낙빙하는 청정봉 봉주가 되기 전의 심청추, 정확하게는 심구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니 과거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낙빙하에게는 제대로 된 생일을 알려주고 싶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9월 21일이다. 지난 지 며칠 되었구나.”

그것은 그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입에 담아보는 그의 생일이었다. 원래 이 몸의 것이 아닌, 그의 것. 그의 생일. 그저 생일일 뿐인데 낙빙하에게 말하는 순간 그의 가장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 중 한 가지를 털어놓은 것만 같았다.

-샤오원, 생일 축하해!

-오빠, 생일 축하해.

-셋째야, 생일 축하한다.

이제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심청추는 잠시 눈을 감고 그리움을 삼켰다. 어쩌면, 이제까지는 그의 곁에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생일을 생각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마음 한구석에서 빈 바람 소리가 났다.

“그렇, 그렇군요….”

“왜 그러느냐?”

낙빙하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은 것도 모자라 눈꼬리와 어깨가 축 처졌다. 산책갈 시간만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강아지가 주인이 오늘은 산책 못 간다고 고개를 젓자 실망해 귀를 축 늘어뜨리는 모습 같았다. 심청추는 손을 뻗어 낙빙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냥 생일이 지났다고 했을 뿐인데, 낙빙하가 왜 그렇게 실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존의 생신을 모르고 지나간 것도 아쉽고,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쉽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미 몇 년이나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새삼 아쉬울 것이 있나 싶었다. 요란스러운 생일 축하를 받은 지도 오래되어, 이제는 생일이 지나갔다 해서 아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낙빙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낙빙하는 확실히, 순정소년처럼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정작 본인의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는 데다 생일 축하 한 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했지만. 심청추는 낙빙하를 달래려 입을 열었다.

“특별히 무얼 할 필요가 있겠느냐? 매년 오는 날인 것을.”

“하지만….”

심청추의 말에도 낙빙하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지나간 그 날이 아쉽고 아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심청추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생일이 낙빙하에게는 그렇게 아쉬워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어쩐지 고맙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심청추는 낙빙하를 어찌 달래야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년도 있지 않느냐.”

생일이란 해마다 돌아오니, 올해 생일이 지났다면 내년 생일이 있었다. 심청추는 손을 들어 시무룩해 보이는 낙빙하의 뺨을 쓸었다. 내년에도 그들은 지금처럼 함께 있을 것이다. 축하하고 싶다면 기회는 충분했다. 낙빙하는 심청추가 당연히 내년을 말하는 것이 좋은지 설핏 웃고는 심청추의 손에 뺨을 기댔다.

“내년에는 꼭 축하해 드리고 싶습니다.”

낙빙하의 눈이 꼭 별처럼 반짝였다. 심청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낙빙하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 성공했다. 내년 생일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그쯤 지나면 낙빙하도 잊어버리겠지, 그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금세 흘렀고….

“기억하고 있었느냐?”

심청추는 살짝 놀라 물었다. 낙빙하는 그의 생일을 잊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날만을 벼르고 별러 온 것 같았다.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막상 기억하려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날짜를 신경 쓰고, 기억하려 애쓰고, 생일을 축하할 준비도 해야 했다. 낙빙하는 심청추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했다.

“사존의 생신이신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나저나 사존, 식사부터 하시지요. 음식이 식겠습니다.”

낙빙하는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었다. 심청추는 맞은편에 앉은 낙빙하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이 세계에서 생일 축하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 세계에도 그를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도 잊어버린 생일을 아는 사람이 있었고, 그를 위해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심청추는 그것이 낙빙하라 좋았다.

“사존, 오늘 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낙빙하가 생각하는 ‘생일을 챙겨준다’는 밥 한 끼를 차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청추는 기대로 가득한 낙빙하의 얼굴을 보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숟가락을 입에 넣고 침묵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바라는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져 더 바랄 것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요즘 심청추의 일과라고 해 봐야 낙빙하와 함께 여기저기 유람하며 돌아다니거나, 느긋하게 어딘가 머물며 쉬는 일밖에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은 없고, 걱정할 일도 없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휴식이었다. 이 세계에 빙의한 그 순간부터 (목숨의 위협을 해결하고)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온 심청추에게는 이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글쎄. 생각나는 것이 없구나.”

“청정봉이나 창궁산이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심청추는 눈을 깜빡였다. 낙빙하가 먼저 창궁산 이야기를 꺼내다니? 창궁산은 낙빙하를 반기지 않았다. 이전처럼 날을 세우지는 않아도 심술을 부리듯 사소한 일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곤 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창궁산파와 낙빙하는 그 대립의 역사가 길었다. 창궁산파는 5년간 심청추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낙빙하와 거의 매일같이 싸워댔고, 낙빙하가 직접 청정봉에 쳐들어가 궁정봉을 짓밟은 적도 있었다. 지금 죽일 듯 싸우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거는 정도로 바뀐 것도 놀라울 일이었다.

창궁산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은 낙빙하도 마찬가지였다. 청정봉과 다퉈서는 아니었다. 청정봉은 봉주인 심청추가 낙빙하를 대놓고 비호하는 데다 낙빙하가 심청추에게 들러붙는 모습을 지겹게도 많이 봐온 터라 청정봉의 제자들은 이제 낙빙하를 그저 심청추의 찰거머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으나, 낙빙하는 청정봉에 가면 심청추가 다른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청정봉주의 일을 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고 심청추를 독점하지 못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티가 풀풀 나니 무시하려고 해도 영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당장 저번에 청정봉에 갔을 때만 해도 제자들의 수련을 봐줄 때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어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그런데 갑자기?

“청정봉 말이냐?”

“예.”

물론 돌아간 지 좀 되기는 했다. 심청추는 대강 한 달에 한 번 정도 낙빙하와 함께 청정봉에 돌아가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게으름을 피우느라 벌써 세 달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심청추는 낙빙하가 먼저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심청추가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기만 해도 질투하는 질투쟁이가? 심청추는 혹시 낙빙하가 탈사라도 당했나 싶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으나,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낙빙하는 아직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 임무에서 돌아와 온화하게 웃던 준수한 열일곱 청년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래, 가보자꾸나.”

심청추는 찜찜함은 접어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한 번쯤 돌아가지 않으면 제청처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두렵기도 했고, 낙빙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낙빙하는 심지어 심청추가 창궁산으로 돌아갈 때 사가던 술을 대신해 처음 보는 술을 선물로 가져가라며 직접 챙겨 오기까지 했다.

“선물 말이냐?”

“네. 봉주회의 때 가져가시면 좋을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돌아가자고 하는 게 끝이 아니란 말이야? 심청추는 술과 낙빙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낙빙하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을 위로 돌렸다. 일부러 지우지 않은 상처가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이상하다? 빙하 맞는데? 심청추는 혼란에 빠져 눈을 깜빡였다. 낙빙하는 심청추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손목을 당겨 심청추를 이끌었다.

오래지 않아 만검봉에서 나온 검 두 자루가 하늘로 날아올라 창궁산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청정봉이었다.

 

*

 

“사존!”

“사존, 오셨어요?”

“그래, 잘 있었느냐?”

수아검과 정양검이 주인과 함께 청정봉에 내려서자, 청정봉에서 수련하던 제자들이 금세 눈치채고 우르르 몰려나와 둘을 맞았다. 심청추는 오랜만에 보는 제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몇 달 사이에 다들 조금씩 더 자랐고,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다. 심청추가 제자들을 살피는 사이 낙빙하는 제 사형, 사저에게 적당히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꼭 다른 제자들에게 심청추를 양보하기라도 하는 듯해서 제자 몇이 그런 낙빙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개중 일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심청추에게 목소리를 죽이고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사존, 혹시… 낙빙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습니까?”

“탈사라도….”

“그런 일 없다. 신경 쓰지 말거라.”

사실 심청추도 신경이 쓰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제자들 앞에서 낙빙하가 이상하다 수선을 떨 수는 없었다. 나쁜 쪽으로 바뀐 것도 아니고, 그저 평소보다 얌전하고 어른스럽게 굴고 있는데. 어쩌면 좀 철이 든 걸지도…. 심청추는 부채를 입가에 대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사존, 궁정봉에 오셨다 알릴까요?”

“그리하거라. 오랜만에 왔으니, 얼굴도 봐야겠지.”

“제가 가겠습니다.”

명범이 재빨리 소식을 알리러 달려나갔다. 명범은 어릴 때 심청추의 가장 믿음직한 제자 자리를 낙빙하에게 뺏긴 것을 두고두고 분하게 여기더니, 자라서도 사사건건 낙빙하 대신 심청추가 시킨 심부름을 하려 했다. 심청추는 멀어져 가는 명범을 힐끔 보곤,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청정봉 안쪽으로 들어갔다. 낙빙하는 백련꽃 같던 막내 제자 시절처럼 은은한 웃음을 머금고 가장 뒤쪽에서 심청추를 따랐다. 심청추는 물론이고 다른 제자들까지 낙빙하를 힐끔거렸다. 낙빙하는 오늘 정말 이상했다!

“다들 맡은 일은 잘 하였느냐? 가져와 보거라.”

청정봉의 제자들은 스승의 부재에 익숙해진 탓인지 - 이건 심청추의 탓이 컸다. -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잘했다. 제자들은 대사형인 명범과 함께 실질적으로 봉주가 자리를 비운 청정봉을 관리하는 녕영영을 필두로 심청추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순서대로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사존, 제자는 화월성 성주가 맡긴 일을 해결했습니다.”

“제자는 근처 마을의 요마를 퇴치했습니다.”

“제자는….”

심청추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되묻기도 하며 제자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한참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어도, 다들 보고를 마치고 어른스러운 척 자세를 바로 하면서도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심청추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다들 나무랄 데가 없구나. 잘 하였다.”

“사존! 저도 임무를 잘 마쳤습니다.”

궁정봉에 다녀온 명범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심청추는 이미 스물 중반을 넘은,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아이들로 보이는 제자들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낙빙하와 함께 떠난 것에 후회는 없지만, 제자들이 이렇게 잘 자라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는 없었으리라. 심청추는 명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잘 하였다. 궁정봉에서 뭐라 하더냐?”

“미시에 궁정봉에서 회의를 한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미시라니, 지금이 사시가 끝나 가니 바로 오라는 얘기 아닌가. 어차피 회의는 금방이고 끝나면 내내 술이나 마실 텐데 오자마자 부르다니. 잔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심청추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들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래, 알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보마.”

“사존, 사백과 사숙들께 드릴 선물을 가져가셔야지요.”

심청추가 일어나자, 내내 조용히 앉아있던 낙빙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낙빙하가 검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만일 청정봉의 다른 제자들처럼 청정봉의 흰 도복을 입고 있었더라면 심청추는 꼼짝없이 옛 기억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뻔했다. 그러나 심청추의 혼란에도 낙빙하는 선물로 가져온 (무려 낙빙하가 준비한) 술을 고이 내밀었고, 심청추는 마치 친구 집에 놀러갈 때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부모님이 챙겨준 선물을 들고 가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술을 챙겼다.

“다녀오세요. 사존.”

제자들이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그러나 그도, 제자들도 모두 낙빙하를 힐끔거렸다. 낙빙하는 제자들 뒤쪽에 서서 심청추를 배웅했다. 심청추는 궁정봉으로 향하려다, 녕영영에게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다.

“영영아.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부르거라.”

“네, 사존.”

녕영영은 그가 무슨 일을 염려하는지 아는지 영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청추는 녕영영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고, 낙빙하를 한 번 살핀 후 궁정봉으로 향했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

질투하지 않는 낙빙하라니? 어른스럽게 구는 낙빙하라니? 심청추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심지어 낙빙하는 항상 그가 봉주 회의에 갈 때마다 빨리 돌아오라며 어리광을 부렸는데, 오늘은 밀린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편히 놀고 오시라며 믿음직하고 친절한 비서처럼 고개 숙여 인사하기까지 했다. 이런 변화가 싫으냐고 하면 답하기 어려웠지만, 좋냐고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낯설기만 했다. 심청추는 한숨을 푹 내쉬며 궁정봉으로 들어섰다. 그를 제외한 봉주들이 다 와 있었다.

“요즘 얼굴 보기가 더 힘들구나.”

“심청추!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장문 사형, 잘 지내셨습니까? 왜냐니. 사매.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지.”

궁정봉의 회의 장소로 들어서자마자 악청원의 온화한 목소리와 제청처의 천둥 같은 외침이 날아들었다. 어투는 달라도 둘 다 한동안 창궁산파에 들르지 않은 일을 탓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심청추는 뻔뻔스레 부채를 팔락이며 책망을 흘려넘겼다.

“선물도 가져왔으니 너그러이 봐주시지요.”

손에 들린 술을 내보이자 몇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심 사형, 좋은 술을 가져오셨군요.”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목청방이 드물게 감탄했고, 취선봉주도 술을 보더니 감탄사를 흘렸다. 세상의 모든 술에 통달한 취선봉주를 감탄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술을 마시기는 해도 썩 잘 알지는 못하는 심청추만 눈을 깜빡였다. 낙빙하는 대체 무슨 술을 챙겨준 거야?

“그거 지금 마시면 안 되나?”

“사형. 회의는 끝내야죠.”

만검봉주가 입맛을 다셨다. 목청방도 위청외를 말리기는 했지만 영 구미가 당기는 모양인지 술에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악청원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려 산만한 나머지 열한봉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악청원은 곁에 선 상청화를 돌아보았다.

“사제. 나눠주게.”

“예. 장문 사형.”

언제나처럼 회의의 서기를 맡은 상청화가 봉주들에게 회의 내용을 적은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회의 내용이라고 할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고행봉주는 이번에도 고행봉의 인원을 늘려달라 주장했고, 청정봉은 봉주부터가 봉에 붙어있질 않으니 딱히 주장할 만한 것이 없었고, 선주봉은 백전봉 제자들에게 옷 좀 작작 찢어먹으라고 항의했다. 아마 제자들의 옷이 성할 날이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류청가는 그 원인을 제자들의 훈련이 부족한 탓으로 돌렸다.

그 외에는 딱히 논의할 거리가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곳곳에 요마가 나타나 수선 문파들이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을 시절이라면 몰라도, 최근에는 북강 마족은 물론이고 남강 마족도 잠잠하고, 특별히 문제라고는 없으니 자연히 가장 큰 수선문파인 창궁산파의 봉주들도 한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조금 이르기는 하다만, 다음 대 봉주 후보로 생각해둔 제자가 있느냐?”

모두가 회의가 끝날 때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악청원이 새로운 주제를 던졌다. 심청추의 고개가 저절로 악청원 쪽으로 돌아갔고, 다른 봉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것은 다들 마찬가지인 듯했다. 제청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 대 봉주라뇨. 사형, 너무 빠른 거 아녜요?”

“그저 봐둔 제자가 있는지 묻는 거란다. 청처야.”

그 말에 제청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입을 열기 전부터 제청처가 누구를 이야기할 줄 알았다. 선주봉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낸 제자가 있었고, 그 제자는 이미 선맹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었다. 제청처는 자신만만하고 뿌듯하게 입을 열었다.

“명연이가 가장 유력하지요.”

“백전봉은?”

“없지는 않지만, 아직 봉주가 바뀌려면 멀었습니다.”

류청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심청추는 류청가가 생각하는 다음 대 봉주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백전봉주의 유일한 제자여서가 아니라, 류청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풀려 있는 탓이었다. 백전봉의 다음 대 제자 중 그의 제자가 아니라 다른 사형들의 제자가 더 강했다면 류청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덜 강했어도 더 강해질 때까지 죽도록 굴렸겠지.

그러다 문득 다른 세계에서는 이럴 기회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광오선마도에서 백전봉주 류청가는 오래전에 주화입마로 죽었고, 청정봉주 심청추(심구)는 다음 대 봉주를 고르기 전에 낙빙하의 손에 인곤이 되고, 개중 다음대 봉주로 가장 유력했을 대사형 명범도 낙빙하의 손에 처참히 죽고, 녕영영은 물론이고 선주봉의 류명연은 낙빙하의 후궁이 되고, 궁정봉주 악청원도 끔찍한 결말을 맞았으니, 이렇게 한가로이 다음 대 제자가 누구일지 고민할 수도 없었으리라.

“청추야. 너는 생각해둔 제자가 있느냐?”

악청원이 심청추를 바라보며 물었다. 심청추는 저도 모르게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 다음 대 봉주라. 금란성의 일로 봉주회의를 했을 때도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고르자면 낙빙하를 따를 자가 없었다. 만일 낙빙하가 무간심연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 표현을 조금 더 정확히 하자. 그가 낙빙하를 무간심연으로 떠밀지 않았더라면 – 심청추는 다음 봉주 후보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과연 낙빙하가 심청추의 뒤를 이어 청정봉주가 되고 싶어 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아도 낙빙하가 청정봉에 머물며 제자를 기르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낙빙하가 계속 청정봉에서 자랐어도 그를 따라오려 하지 않았을까.

다른 제자는 어떨까. 심청추는 낙빙하가 사라진 이후 명범과 영영을 제 뒤에 세웠다. 그중 대사형인 명범은 지금이야 나아졌다지만 질투가 심한 편이었고, 자꾸 다른 곳에 관심을 보여 청정봉을 맡기기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오히려 믿음직스럽기로는 녕영영이 제일이었다. 흠. 심청추는 눈을 깜빡였다. “사존, 임무를 잘 해냈습니다!”라며 몸을 곧게 세우고 보고하던 녕영영의 모습을 떠올리니, 눈치 없고 철도 없는 어린 제자였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만일 심청추가 누군가에게 청정봉을 맡겨야 한다면, 지금은 그 아이 외에 다른 아이를 떠올릴 수 없었다. 누구보다 청정봉을 아끼고, 사람을 이끌 줄 아는 아이니.

“예. 있습니다.”

“설마 짐, 그 자식은 아니겠지.”

“빙하는 이미 환화궁의 궁주인데 청정봉을 맡길 순 없지.”

류청가가 짐승 새끼 비슷한 말을 하려다 말을 고쳤다. 심청추는 굳이 류청가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환화궁에 마계까지 맡고 있는데 새로운 일을 주는 것도 적절치 않았고, 애초에 지금의 낙빙하는 청정봉주 자리를 준대도 심청추와 있겠다며 거절할 게 뻔했다.

“그래, 생각해 둔 제자가 있으면 됐다.”

악청원은 온화하게 웃으며 다른 봉주들에게 물었다. 모두 제자를 기른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인지 다음 대 봉주 자리를 물려줄 만한 제자 한두 명씩은 생각해 놓은 듯했다. 만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지금의 봉주들이 제자들에게 봉주 자리를 물려주면 어떻게 될까. 심청추의 생활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낙빙하와 함께 돌아다니겠지. 그리고 광오선마도의 창궁산파와 달리 이 세계의 창궁산파는 평화롭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리라. 그것도 꽤 마음에 드는 변화였다. 언젠가 그가 영영이 이끄는 청정봉을 보러 올 날도 있을 것이고, 그때도 곁에는 빙하가 함께할 것이다.

“자, 오래 기다렸다. 이제 마시자꾸나.”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사형.”

심청추가 가져온 술 단지를 열자 은은한 댓잎 향이 났다. 과연 목청방과 취선봉주가 감탄할 만큼, 그리고 낙빙하가 그에게 특별히 챙겨줄 만큼 좋은 술이었다. 술은 배분대로 돌아갔고, 악청원 다음으로 술을 받은 심청추는 마지막 봉주까지 술을 받기를 기다렸다. 악청원이 잔을 드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제 몫의 술을 마셨다.

나름 생일주인가. 심청추는 괜한 감상에 잠겼다. 혀끝에 감기는 술이 제법 달았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오늘이 그의 생일이란 걸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그를 위해 이 술을 준비해 준 사람은 아마 이 술에도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았으리라. 심청추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어째 이상하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데.

손으로 빈 잔을 굴리자 잔에 술 대신 고민이 찼다. 남은 향이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대신해 심청추 주위를 맴돌았다. 아침에는 특별히 신경 쓴 티가 팍팍 나는 아침상을 차려와 놓고, 자기가 먼저 창궁산이나 청정봉에 가는 게 어떠냐 하는 이야기를 꺼내고, 봉주회의에 가져가라며 술을 준비하고, 청정봉에서도 평소처럼 붙어있는 대신 일부러 뒤로 물러나 있고…. 마치 자기가 빠져 주어야 하는 자리처럼.

그게 신경이 쓰였다. 생일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이 세계에서 그의 생일을 아는 사람은 낙빙하뿐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생일 축하도 못 받는데. 술 탓인지 속에 열이 올랐다. 심청추는 약간 짜증스럽게 접선을 부쳤다. 바람은 뺨은 식혀도, 속까지는 식혀주지 못했다.

 

*

 

“심 사형. 한잔 더 드릴까요?”

오늘 봉주들은 술귀신이 들린 것처럼 연신 술을 마셔댔다. 심청추가 두 잔인가 세 잔을 비웠을 때쯤, 몇몇은 이미 열 잔 넘게 마셔댄 뒤였다. 심청추는 이미 취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들을 돌아보곤 고개를 저었다. 술은 분명 맛있긴 했지만, 오늘은 왜인지 딱히 끌리지 않았다. 술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은 반갑고 좋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슬쩍 바라본 창밖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이제 일어날 때도 되었다. 심청추는 접선을 접고 악청원에게 말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왔는데, 벌써 일어서느냐.”

“할 일이 있어서요.”

할 일이라니. 사실 아침에 일어나 하는 일이라곤 낙빙하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느긋하게 뒹굴거나, 낙빙하와 함께 유람하듯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심청추가 대기에 적절한 핑계는 아니었다. 심청추의 구체적인 생활상은 몰라도 심청추가 바쁜 일이 없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악청원이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심청추는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어차피, 이 모든 말은 자리를 뜨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어디 가?”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볼게.”

제청처가 불렀으나, 심청추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고주망태가 넘치는 술판에서 빠져나왔다. 날이 저물어 부쩍 서늘해진 바람이 약간 취한 정신을 깨웠다. 심청추는 궁정전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러자 조금 더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차피 그다지 많이 마시지도 않았으니, 홀로 청정봉으로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걸어가는 시간도 아까워 수아를 탈까 했으나,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봉주가 술에 취해 비검에서 떨어진, 창궁산파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수치스러운 사건이 될 테니 심청추는 안전하게 걸어가기로 했다.

재촉하는 사람도, 바쁠 일도 없는데 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동쪽에서 덮쳐오는 밤이 쫓고, 서쪽에서 저무는 해가 달아나는 저녁에 심청추는 쫓는 밤처럼, 쫓기는 해처럼 빠르게 걸었다. 뛰지 않은 것은 봉주의 마지막 체면 때문이었다.

심청추는 궁정봉으로 갈 때보다 훨씬 빨리 청정봉으로 돌아왔다. 서둘렀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청정봉이 가까워졌을 때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사존?”

청정봉 앞뜰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제는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장대 빗자루를 든 채로. 입은 옷은 입은 사람이 궂은일이라곤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일 거란 착각이 들게 할 만큼 귀한 태가 나는데, 정작 입은 사람은 능숙한 동작으로 비질을 하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렸다. 왜인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심청추는 일부러 접선을 펴 얼굴을 가렸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일을 끝내고 시간이 남아 앞뜰을 쓸고 있었습니다.”

그걸 벌써 다 했다고? 심청추는 속으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아까 심청추가 대충 확인했을 때는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대가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심청추라면 하기 싫어 바닥을 기면서 며칠간 붙잡고 있어야 겨우 끝낼까 말까 했을 분량이었다. 그런데 낙빙하는 이미 일을 마친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일을 다 했으면 쉬지, 왜 일을 만들어 하느냐.”

“청정봉의 일인걸요. 그런데, 일찍 오셨군요.”

낙빙하는 손을 튕겨 수북이 쌓인 낙엽을 깨끗이 태워버렸다. 비질은 고전적인 방식을 택한 주제에 처리는 혁신적이었다. 심청추는 불타 사라지는 낙엽을 잠시 힐끔거렸다. 일찍 왔냐는 낙빙하의 질문에 무어라 답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낙빙하의 말이 맞았다. 평소 봉주회의(와 그 이후의 술자리)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곤 했다. 오늘 심청추가 돌아온 시각은 평소보다 빨랐다.

“일이 있어서 일찍 왔다.”

결국 심청추가 택한 말은 봉주들 앞에서 내뱉은 변명과 같았다. 낙빙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가 모르는 일이 있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심청추는 손을 움직여 침묵 사이로 접선을 접었다. 해가 저물어, 바닥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어느 부지런한 제자가 일찍이 켜놓은 등이 뜰을 밝혔다. 심청추는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낯부끄러운 말을 뻔뻔스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각해보니, 생일에는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과 있어야 할 것 같더구나.”

낙빙하가 검은 눈을 깜빡였다. 심청추는 어쩐지 입이 근지러워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려는 말이 낯간지러운 말이란 걸 알기 때문인지 혀가 저릿저릿했다. 말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용기가 필요했다. 심청추는 하려던 말 대신 낙빙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너는 왜 청정봉으로 오자고 한 것이냐?”

“…사존의 생신이니까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대답이 나왔다. 낙빙하의 말은 맞는 답이기는 하지만 심청추가 원하는 말은 아니었다. 멀리서 제자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심청추는 영력을 사용해 낙빙하가 들고 있는 빗자루를 죽사 쪽으로 보내버리고, 낙빙하의 손을 쥐었다. 낙빙하는 짝이 맞물리듯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심청추는 낙빙하를 이끌고 죽림으로 향했다. 둘의 키보다도 높게 자란, 오래된 대나무가 빽빽이 자라난 죽림은 남의 눈을 피하기에도,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았다.

“내 말은, 왜 내 생일에 굳이 청정봉에 오자고 했냐는 말이다.”

죽림 깊은 곳, 그들을 지켜보는 존재라고는 솟은 대나무와 어느새 뜬 달밖에 없는 자리에서 심청추는 다시 물었다. 여전히 낙빙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낙빙하가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시선도 손만큼이나 산만하게 데구르르 굴러갔다. 낙빙하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존께서 청정봉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봉주들을 보고 싶어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는 제가 늘 사존과 함께 있으니, 오늘만이라도 사존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 한다 여겨 그리하였습니다. 사존의 생신이니까요.”

내뱉는 말은 마치 쏟아붓는 것 같았다.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토해내고, 낙빙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늘 내내 보였던 ‘어른스러운’, ‘철이 든 것 같은’ 모습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내내 그런 척하느라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심청추는 눈치를 보듯 눈을 내리깐 낙빙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낙빙하는, 청정봉에 오고 동문들을 만나는 것이 심청추에게 생일선물이 될 줄 알고 그리 했다.

“청정봉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것도, 동문들을 만난 것도 좋지만….”

심청추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낙빙하는 심청추가 하려는 말을 기다리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심청추는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보이는 제자를 위해, 오늘 하루 그를 위해 질투심도 독점욕도 내려놓고 그의 등을 떠밀었을 연인을 위해 체면을 내려놓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사람과 있고 싶구나.”

낙빙하의 입이 놀람으로 벌어졌다. 심청추는 얼굴을 들어 낙빙하의 입가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용기를 끌어모았어도 민망함에 귀 끝이 붉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심청추가 눈을 피했다. 그러나 눈을 피한 보람도 없이, 거대한 몸이 개가 주인을 덮치듯 심청추를 덮쳐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안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사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너 설마 우는 건 아니지? 낙빙하는 심청추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닿은 몸이 뜨끈뜨끈했고, 다행히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간 이 아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그게 싫으냐고 하면 아니었지만.

“사실은 둘이서 보내고 싶었습니다.”

낙빙하가 드디어 본심을 털어놓았다. 여전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심청추는 손을 들어 낙빙하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심청추도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낙빙하가 그를 위해 청정봉으로 가자는 얘기를 한 것이 좀 대견하고 뿌듯하기는 했다. 이 질투쟁이가 그를 위해 하루를 양보한 것이. 낙빙하가 작년 생일을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알기에 더 그랬다.

“선물도 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할 수 있겠군요.”

선물? 심청추가 의아해하는 사이 낙빙하가 몸을 똑바로 세웠다. 낙빙하는 이제 웃고 있었다. 달빛이 낙빙하의 얼굴을 비추어 얼굴이 환했다. 사실, 달빛이 없었어도 환했으리라. 그만큼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였고, 낙빙하가 너무 밝게 웃고 있었고, 반짝거렸고….

낙빙하는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를 내밀었다. 길이는 일 척(30cm)정도 되어 보였고, 새겨진 무늬가 화려했다. 청정봉주로 살면서 호화로운 물건을 많이 보았고, 전생에서도 좋은 물건은 꽤 보았지만, 이 물건도 만만치 않게 화려했다. 나무로 섬세하게 조각된 무늬 사이에는 보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화려해도 너무 화려한 거 아니야? 상자가 이러면 안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건데? 심청추는 주절거림을 삼키며 상자를 받았다.

“지금 열어도 되겠느냐?”

“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어째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선물은 그렇다. 받는 사람이 기뻐해 주길 원하고 좋아해 주길 바라며 주는 것이기에 받는 사람이 상자를 여는 순간 긴장되고 떨릴 수밖에 없다. 심청추는 낙빙하의 긴장을 덜어주려 빠르게 상자를 열었다.

“이건,”

“사존께서 가장 자주 쓰시는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눈 돌아가게 화려한 상자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도, 그 안에는 곱게 접힌 접선이 들어있었다. 부채 끝에 검은색 술과 붉은 구슬이 달린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정한 부채였다. 심청추는 천천히, 그 부채를 펼쳤다. 부채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대나무에 관한 시조 한 구절이 쓰여 있었다. 심청추는 가만히 대나무와 시구를, 정확히는 그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네가 직접 썼느냐?”

심청추는 낙빙하의 글씨체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낙빙하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는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붉었다. 심청추는 고개를 끄덕이고, 붉은 구슬과 검은 술을 바라보았다. 이거 어째… 낙빙하의 색과 같았다. 심청추는 손으로 술을 쓸었다. 좋은 것을 썼는지, 손에 매끄럽게 감겼다. 그는 그에게 이 선물을 주기 위해 종이에 직접 대나무를 그리고 시구를 썼을 낙빙하를 떠올렸다. 이 술을 고르고, 장식을 골랐을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또, 사랑스러워서.

심청추는 그가 원래 쓰던 부채를 낙빙하가 준 상자에 넣었다. 새로 받은 부채는 원래부터 그의 것인 것처럼 손에 익었다. 심청추는 펼쳤던 부채를 접었다.

“고맙구나.”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마음에 든다.”

그제야 낙빙하가 모든 걱정을 내려놓은 듯 웃었다. 낙빙하는 제 손을 뻗어 심청추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웃으며 물었다.

“즐거우셨습니까?”

“그래. 좋은 날이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낙빙하가 심청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심청추는 낙빙하의 생일 축하를 받으며 선물 받은 부채를 펼쳤다. 가볍게 흔들자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낙빙하가 심청추의 어깨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내년에는 둘이서 보낼까요, 사존.”

“그래. 그날엔 무얼 하고 싶으냐?”

“그때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년 생일. 심청추는 낙빙하가 당연히 다음 해의 생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내년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이 함께할 것이기에. 심청추는 낙빙하의 들뜬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가 오늘 받은 그 어떤 선물보다도 좋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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